연재 001 조선왕조실록 편찬 과정 및 사초 사관의 역할 태조 공정 태종실록 편찬 봉안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3.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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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연재 001 조선왕조실록 편찬 과정 및 사초 사관의 역할 태조 공정 태종실록 편찬 봉안에 대해 알아봅니다.

실록 궤짝, 5대 사고, 무주 적상산 사고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 때까지 조선왕조 25대 472년 간의 역사가 담겨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원본은 총 1,893권 888책에 달하는 한문본으로, 한 왕조의 기록으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역사책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안에 있는 규장각과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 각 1부씩 보관되어 있습니다.

1968년부터 시작된 <조선왕조실록> 국역 작업은 무려 25년 만인 199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320쪽짜리 책으로 413권에 달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사 및 동양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조 어진과 일성록

다만 국역본은 번역자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한문번역 방식이나 세부지명등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도 있어 보입니다. 특히 야사에 다루어진 부분이 정사를 능가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앞으로는 개선되어지리라 믿습니다.

오대산 사고, 태백산 사고, 정족산 사고

조선시대 실록 편찬의 전통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왕이 승하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실록청을 개설하고, 춘추관과 예문관의 관리들이 모여서 실록 편찬에 들어갑니다.

실록은 '사초' 를 기초로 쓰여집니다. '사초' 란 왕과 대신들의 논의에서부터 각종 사건과 상소,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평가까지를 사실대로 매일매일 써 놓은 기록을 말합니다.

'사초' 를 기록하는 사람은 사관으로 사관들은 왕이 나라의 정치를 논하는 자리는 물론 대신들과 만나는 개인적인 자리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대화 내용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고 평가합니다.

사관은 객관적인 역사 기록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어야 하는 '직필의 원칙' 을 따라야 합니다.

오대산 사고

사관은 춘추관의 당상관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영의정이 겸임)에서부터 수찬관이 문관 출신인 참하관 중에서 선발하고자 하는 사관의 직품과 상등(相等)한 자를 대상으로 ① 경사와 문장이 뛰어나고(시험에 통한 자), ② 내·외 4조(증조·조·부·외조)에 흠이 없고, ③ 인품이 공정한 자를 3배수로 뽑아 이조에 관문(關文)을 보내면 이조에서 계문하여 제수하였습니다. 그만큼 한림학사 8인에 대한 위상은 드 높다 할 것입니다.

사관들이 '직필의 원칙' 을 지킬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초'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사관이 '사초'를 누설할 경우 사관 본인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엄벌이 내려졌으며 설령 왕일지라도 실록과 '사초'는 보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사초

'사초' 가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한 또 한나의 장치로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의 자료로 쓰였던 '사초' 와 중간 수정본을 모두 없애 버리는 '세초' 라는 작업이 행해집니다.

실록이 완성되어 사고에 모셔진 다음 날 실록을 작성한 사관들은 차일암에 나와 '사초' 를 물에 씻어 기록을 없앴고 왕은 사관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1987년 경기도 여주에서 인조때 사관이었던 정태제의 무덤에서 사초가 발견됩니다. 정태제가 쓴 사초에서는 시종일관 인조의 정치를 꼬집는 글이 자주 나옵니다. 이처럼 올곧은 사관 사초가 있었기에 역사의 평가를 받는 실록이 만들어 져서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하겠습니다.

태조실록

그러나 때로는 당쟁으로 인해 '직필의 원칙' 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연산군 4년 7월에 일어났던 '무오사화' 시 세조의 비리를 기록한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가 되어 수백 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사관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붓이 무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당쟁의 영향으로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수정실록> 등과 같이 왕조의 실록이 2번 편찬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처음 썼던 실록과 수정된 실록을 모두 남김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종 이후에는 왕궁 안에 있는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 성주, 전주 4곳에 사고 보관소를 만들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4부의 실록을 인쇄하여 보관했는데 만약 실록을 훼손시키거나 도둑맞으면 담당관리에게 엄한 벌이 내려졌습니다.

1910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제는 <조선왕조실록>의 이름을 <이조실록>으로 바꾼 후, 1934년에 <고종실록> 과 <순종실록>을 편찬했는데 실록 편찬을 맡은 33명 가운데 11명이 일본인 이었으므로 내용은 일제의 입장대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세종대왕도 태종실록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지만 사관의 반대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세종때에 이르러 태조, 공정(정종), 태조 실록이 완성됩니다.

1431년 세종13년 3월 예문관 검열 김문기가 태종실록 36권을 춘추관에서 삼가 왕지를 받들어 찬하여 올리고, 1431년 세종 13년 4월 25일 예문검열 김문기를 보내 태조, 공정(정종-숙종때 묘호가 정해짐), 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실록 봉안 의식

 

<실록을 지킨사람들>

1592년 4월 14일 20만 왜군이 부산포로 쳐들어 옵니다. 실록은 모두 불타 버렸고 오로지 전주사고에 봉인되어 있는 실록만 남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6월 왜군이 들이닥쳐 결국 전주사고도 불타고 말았지만 태인지방에 사는 이름없는 유생 안의(64세)와 손홍록(56세)이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과 어진을 50여필의 말에 64궤짝을 싣고 내장산 은봉암으로 피신시킵니다.

왜군이 계속 밀고 올라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태조의 어진을 더 깊은 용굴암으로 옮기고 실록을 비래암으로 옮깁니다. 두 노인은 무려 370일 동안 마지막 남은 실록 한 부를 지키기 위해 밤잠을 자지않았으며, 2천리 길을 걸어 선조가 있는 해주까지 가서 전달합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문화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현재 까지 남아있음을 감사히 여기고, 1993년 이후에 비로서 한역화한 초창기 버전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역사를 바로 아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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