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3 조선왕조실록 조선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자 최고의 정치가 이성계와 주변인물에 대해 알아봅니다. 01

2024. 2. 5.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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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어진

연재 003 조선왕조실록 조선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자 최고의 정치가 이성계와 주변인물에 대해 알아봅니다. 01

이성계 어궁구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태조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새 나라의 창업은 그 시대 전반에 걸친 새로운 가치 체계 및 이념을 정립하게 되기 때문에 민중들의 생활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이성계의 조선의 건국은 고려말의 혼란기에 정권을 장악하고 새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서 그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전란속에 뜬 별>

이성계(135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6년 2개월)는 고려 27대 충숙왕 4년(1335년) 화령부(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선조는 원래 전주사람으로 고조부 이안사대에 간도 지방인 남경으로 들어가 원의 지방관으로서 기반을 닦고 아버지 이자춘에 이르러 천호 정도의 벼슬을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원의 쇠퇴기로 고려 조정에서는 친명배원 정책에 따라 공민왕 5년 1356년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데 이자춘 및 이성계의 절대적인 공헌으로 함흥 이북을 고려가 탈환합니다.

공민왕 10년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철령 이북지역) 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이 지역 일대의 군사권을 장악합니다. 또한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됩니다.

이성계는 1361년 박의의 난, 1362년 홍건적의 침입,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 1364년 최유와 원의 침입, 삼선 삼개의 난, 1369년 요동의 동녕부 공격, 1380년 왜구 출몰, 1382년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승 했습니다.

 

이지란(1331~1402, 충혜왕 1년~태종 2년) : 여진족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퉁쿠룬투란티므르' 이다.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었으며, 고려에 귀화하여 이씨(청해 이씨 시조) 성을 받았다. 고려 우왕 6년에 황산에서 이성계와 함께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크게 무찔러 황산대첩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개국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출처 입력

박의의 반란 : 공민왕 10년 1361년 9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가 배반하여 천호인 임자부와 김천룡을 죽이므로, 왕이 형부상서 김진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김진이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금오위 상장군이었던 이성계가 병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 박의를 제압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나하추(?~1388) : 여진족 출신의 원나라 장수로 1362년에 고려의 친원파인 조소생과 탁도경이 도움을 청하자, 함경도 북청과 흥원지방을 침입하였으나 이성계가 동북변병마사가 되어 격퇴시켜 심양쪽으로 쫓아버렸다. 후에 나하추는 명나라에 항복하였고 1388년 남방 원정에서 죽었다.

여진족 : 만주 동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진에 대한 명칭은 수,당때는 말갈족, 10C 초 송나라때 여진족, 청나라때는 만주족이라 하였고, 고래때 금나라를 세웠으며 조선시대에는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세력을 확장하여 중국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함흥 귀주사 태조 서원

최유(?~1364) : 고려말의 반역자, 1342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여러 악행으로 원과 고려 양쪽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성계와 최영에게 패한후 원나라에 원정군을 청했으나, 원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칼을 씌워 고려로 돌려보내 , 결국 최유는 대역죄를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덕흥군(?~?) : 고려 충선왕의 셋째아들. 일찍이 고려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나라로 들어갔다. 최유와 기황후에게 공민왕을 폐위할 것을 청하자,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1363년 최유와 덕흥군은 군사 1만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성계와 최영에게 패해 원나라로 돌아갔다. 패전의 책음을 물어 덕흥군은 장형에 처해지고, 고려의 요구로 압송되려는 차에, 등창으로 압송되지 않고 그곳에서 죽었다.

 

왜구의 침략 : 왜구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대마도를 근거지로 우리나라와 중국 근해를 약탈하던 일본 해적을 가르키는 말이다.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가장 심했는데 고려말 40년간이 특히 심해 고려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때 왜구가 처음으로 침입한 것은 1223년 이었으나, 공민왕때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더욱 심해져 동해, 서해, 남해, 내륙까지 침범하였다. 우왕때 특히 심해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왜구의 침략을 받았을 정도다.

황산대첩 :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黃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왜구가 1380년 8월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왜구는 상주·영동·옥주(옥천), 경산(성주)을 침략하고, 사근내역(함양)에 집결하였다. 이때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배극렴(裵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勇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충청)·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이성계 이복형)·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두목-아지발도(阿只拔都)] 대토벌작전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둠.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사』열전 변안열(邊安烈)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우왕(1365~1389) : 고려의 32대 왕이다. 공민왕이 신돈의 시녀였던 반야와 가까이해서 낳은 아들이다. 그는 신돈이 죽자 곧바로 궁궐로 들어와 교육을 받았고, 궁인 한씨의 아들로 발표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 (홍윤, 최만생,자제위 익비임신) 되자 불과 10살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창왕(1380~1389) : 고려의 제 33대 왕으로 우왕의 아들이다. 위화도 회군후 우왕이 폐위되자 조민수, 이색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 9세였다. 즉위 다음해인 1389년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가입진론에 따라 우왕과 창왕이 모두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당하고 강화에 유배되 사사된다.

 

동녕부 : 고려 서강(평양)에 설치된 원나라 통치기관. 1269년 원종 10년에 최탄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60개 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원나라 세조는 자비령(황해도 서흥군에 소재)을 경계로 삼아 그 이북을 모두 원나라의 소유로 한 뒤,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원종은 동녕부 반환을 주장하였으나, 원은 끝내 돌려주지 않다가 원명 교체기에 동녕부를 요동으로 옳기고 그 땅을 고려에게 돌려준다.

1369년 이성계 지휘로 요동의 동녕부를 공격하고 요동을 차지하지만, 그 넓은 땅을 다스릴 수 없어 1370년 이후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 : 고려의 34대 마지막 왕으로, 1389년에 이성계, 심덕부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1391년 정몽주가 살해되고 나서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이난다.

이성계 친필 글씨

<유연한 정치감각>

이성계는 지방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탄핵받은 일 없이 중앙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적을 만들기 보다는 장기적인 교류를 통한 동지적 의기투합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개혁성향이자 신진사대부인 조준, 권근, 남은, 정도전등과의 교류가 입증합니다.

 
 

남은(1354~1398, 공민왕 3년~태조 7년) : 정도전과 더불어 이성계 일파의 중심인물. 1388년 우왕 14년의 요동정벌에 따라 종군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할것을 조언하였다.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태조를 도와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데 적극 간여하다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원에게 정도전과 함께 피살됨. 세종때 좌의정으로 추증.

출처 입력

 

<교려의 외교 실패>

1374년 친명배원주의자였던 공민왕이 환관들에게 시해된 사건은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명은 철령 이북을 요동에 복속시키겠다며 한층 고려를 압박하였으나, 무능한 고려정부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는등 외교에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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