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2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편찬경위 태조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4. 06:01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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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과 태조실록

 

연재 002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편찬경위 태조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경복궁 어도

<태조실록 편찬 경위>

'태조실록'은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92년 7월부터 1398년 12월까지 6년 5개월 12일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명은 '태조강헌대왕실록'이며, 현재 남아 있는 강화도 정족산본은 필사본이고, 태백산본은 인쇄본입니다.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태조가 1398년 9월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정종 시대)과 태상왕(태종 시대)을 지내다가 1408년에 74세로 일기를 마치자 태종은 이듬해 8월에 '태조실록' 편찬 작업을 시작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때 춘추관과 기사관, 송포 등은 조선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이 처음인 데다가 시대가 멀지 않고, 그 당시 활동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 있다는 이유로 실록 편찬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태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사관들에게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초 제출기한은 한양 거주자의 경우 10월 15일, 지방 거주자의 경우 11월 1일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사초가 잘 들어오지 않자 태종은 사초를 제출하지 않은 자에 대해 자손을 금고(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함) 하고 벌금 20냥을 징수하도록 하는 처벌 규정을 마련해 사초 제출을 독려합니다.

그래서 1410년 정월부터 하륜, 유관, 정이오, 변계량 등을 중심으로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1413년 3월에 완성됩니다.

오대산 사고, 태백산 사고, 정족산 사고

하지만 '태조실록'은 완성된 후에도 곧바로 출판되지 못합니다. 실록을 살펴본 조정 대신들이 중복된 기사가 많다며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신들이 지적한 것은 '제1,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편찬 책임을 맡았던 춘추관 관료들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 '태조실록'은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출판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가 1431년 세종 13년 3월 예문관 검열 김문기가 태종실록 36권을 춘추관에서 삼가 왕지를 받들어 찬하여 올리고, 1431년 세종 13년 4월 25일 예문 검열 김문기를 보내 태조, 공정(정종-숙종 때 비로소 묘호가 정해짐), 태종실록을 충주 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충주 사고 하나 만으로 영구 보존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자 1445년 11월 21일 태조실록 15권 공정 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3부를 더 필사하여 충주 전주 성주 사고에 각각 1부씩 봉안했습니다.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 본의 삼조 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했던 것입니다. '태조실록'은 태조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부터 1398년 12월 말까지 약 6년 6개월간에 있었던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연월일 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인 1398년 9월 5일에 정종에게 양위하였기에 그의 재위 기간은 실제로 이때까지지만 '태조실록'에는 그해 말까지를 수록 범위로 잡고 있습니다.

태조 가계도

태조의 생애와 치세(135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6년 2개월)

태조는 함흥지역의 호족이었던 이자춘(쌍성총관부의 천호)과 영흥의 세력가 최한기의 딸 사이에서 맏아들(첩의 자식으로 첫째 원계, 셋째 화)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성계 였다가 후에 단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처음 자는 중결 이었다가 나중에 군진으로 바꿨으며, 호는 송헌입니다. 그는 1335년(고려 충숙왕 4년) 10월 11일 함경도 영흥(화령부) 흑석리의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20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장수로서 맹위를 떨쳤는데, 특히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 '신궁'이로 불렸습니다. 1360년에 아버지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을 계승합니다. 1362년 동북면병마사에 오른 이후 숱한 전쟁을 치르며 많은 전공을 세워 진급을 거듭합니다. 밀직부사 등을 거쳐 1382년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도원수문하찬성사, 1388년에는 수문하시중이 되어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여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했는데, 그는 정몽주 등과 함께 폐가입진론(흥국사 9대신-이성계,정도전,조준,심덕부,지용기,설장수,성석린,박위,정몽주)을 내세워 창왕을 내쫒고 공양왕을 옹립합니다.

경복궁

하지만 공양왕이 정몽주와 더불어 자신을 축출하려고 하자 정몽주를 죽이고 공양왕을 폐위한 뒤 1392년 7월 16일에 정도전, 남은, 조준 이방원 등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조선'으로 바꿉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여러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숭유억불 정책'을 펴 나갑니다.

6년 2개월 동안 왕위에 머물다가 1398년 8월에 다섯째 아들 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의 중신들과 세자 방석을 죽이자, 9월에 차남 방과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고 물러납니다.

창덕궁 인정전

왕위를 빼앗긴 그는 정변을 주도한 이방원(태자)을 몹시 미워하여 함주(함흥)에 머물며, 안변부사를 지낸 조사의 등 동북 세력을 앞세워 복위를 꾀했으나 실패합니다. 이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태종과도 원만한 관계로 지내다가 1408년 5월 24일에 창덕궁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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