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3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의 치적과 소헌왕후 심씨 영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27. 06:01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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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01

연재 013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의 치적과 소헌왕후 심씨 영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조선 역대 왕중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1397.4.10~ 1450.2.17 재위기간 1418.8.~1450.2. 31년 6개월)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고<월인청강지곡>을 비롯하여 <용비어천가> <고려사> <석보상절> 등 많은 책을 편찬케 했으며,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등 새로운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게 하고, 음악을 정리하여 아악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등 조선초기의 예악을 정비하고, 무비에도 힘써 6진을 설치하는 등 내정, 외치, 문화 등에 찬란한 업적을 남긴 대왕입니다.

세종은 태종의 3남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으로, 한양의 잠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이며 1408년(태종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2년(태종 12년)에 충녕대군으로 진봉됩니다.

영릉 02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번지에 위치한 영릉은 세종과 서헌왕후 심씨의 유택입니다. 당초의 영릉은 세종 28년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 언덕에 동릉이실(능 하나에 봉분속 석실을 둘로 하는 합장 형태로 이른바 쌍실)로 조영된 능이었다. 오른쪽 석실은 세종의 수릉(생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능)으로 삼고, 외쪽은 소헌왕후 심씨를 봉안하였습니다. 그후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 즉위년에 합장하니 조선 최초의 합장능이 된 것입니다.

영릉 03

세조 때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니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이 그때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라며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이곳 여주로 옮겨 단릉의 합장 형태로 능을 만들었습니다.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묻힌 석물들은 1973년에 발굴되어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 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청량리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구 영릉 석물 01
구 영릉 석물 02
 

1418년 6월 충녕대군은 태종의 뜻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8월 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등극하였으며, 태종이 이룩한 건국 초기의 안정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 군사, 문화 과학 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즉위 초기 4년 동안은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국대사를 관장하여 처리하였으며, 세종은 안정된 왕권의 기반위에 소신있는 정치를 추진하고자,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며 <효행록>을 시작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작업을 펼쳐 문화 수준을 높였습니다.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할 때에는 경연을 중지하고 왕 자신이 밤 늦게까지 친히 교정을 보았습니다.

경복궁 수정전_집현전

민족문화 유산중 가장 빛나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간의대 설치, 혼천의 제작, 물시계 해시계 제작, 측우기 발명 등을 통해 천문학과 농업기상학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새로운 금속 활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중국기술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화포를 발명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농업, 의학, 음악, 법률, 예악등 이루말할수 없는 괄목한 치적을 남겨 문족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세종 26년인 1444년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이음해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을 그 다음해에 소헌왕후를 차례로 잃고 그 자신도 건강이 악화되어 불교에 마음을 기울여 세종 30년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을 세웠습니다.

세종은 1450년 2월 17일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별궁에서 보령 54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세종 가계도

소헌왕후 심씨(1395.9.~1466.3.24, 태조4년~세종28년) : 아버지는 영의정 청송 심씨 심온,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양주에서 태어났으며 14세인 1408년(태종 8년) 두살 아래인 충령군 도와 혼인.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함. 1418년 6월 경빈으로 봉해지고 12월에 왕비(공비)로 책봉. 강상인의 옥으로 아버지 심온이 죽자 박은 조말생등이 폐비를 주청하였으나 세종이 극구 변호함. 그녀의 어머니 안씨까지 천비로 전락. 52세 졸. 영릉에 세종과 합장. 아들 8형제(문종,세조,안평 등) 와 두딸(정소,정의)을 둠. 조부 심덕부 문하좌시중, 좌정승, 부 심온 영의정, 아들 심회(소헌왕후 동생) 영의정 - 조선 3대 최초 수상, 부 심온(5남)이며, 작은아버지 심종(6남)은 태조 경선공주 부마. 작은아버지 동지총제 심정은(7남), 외삼촌 안수산.

 

강상인의 옥(1418년, 세종1년) : 태종은 심온에게 국구의 예로서 영의정에 제수하고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는데, 심온 환송행렬이 장안을 메웠다는 소리를 듣고, 아우인 도총제 심정 및 병조참판 강상인이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 알리지 않는등 태종을 분노케 해, 우부대언 원숙,병조좌랑 안헌오, 좌의정 박은(어효첨 장인, 47세 좌의정)등의 주청으로 병조판서 박습(참형), 이조참판 이관(참형), 병조참판 강상인(거열형), 병조참의 이각(유배), 병조좌랑 채지지(유배), 동지총제 심정(청)(참형), 영의정 심온(44세, 자진-유정현 말을 듣고 이해)을 처단한 사건.

신륵사

https://map.naver.com/p/search/%EC%97%AC%EC%A3%BC%20%EC%8B%A0%EB%A5%B5%EC%82%AC?c=12.00,0,0,1,dh

능역을 벗어나 동쪽으로 남한강 지류를 건너 차로 20분쯤 달리면 신륵사가 나오는데 이곳이 영릉의 원찰입니다. 여주읍 동북쪽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신륵사는 다른 사찰들이 산속에 자리잡은 것과 달리 동서로 길게 누운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 옆에 드넓은 모래벌과 넓은 여주 들판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영릉을 여주로 옮긴후로 원찰을 세우기로 하고 당대 권신인 한명회 등에게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지 못하고, 인근에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으니 중수하여 원찰로 삼았습니다.(1472년 성종 3년, 보은사로 불림-이후 성리학의 영향으로 원찰제도가 없어져 다시 신륵사라 칭함.)

신륵사 강월헌

신륵사는 구룡루, 극락보전, 운룡문이 새겨진 다층석탑, 조사당, 명부전, 반원의 두 줄로 된 문양과 당초문이 양각되어 있는 다층 전탑등이 있는 역사깊은 사찰입니다. 사찰 아래에는 나옹화상의 당호를 따라 강월헌이라는 육각의 정자가 강가 바위위에 서 있는데 여주평야와 남한강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꼭 한번 가보세요.

영릉 입구
영릉 측면
 

영능은 원래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 산에 마련하였다가, 예종 원년인 1469년 3월 6일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성산으로 옮겼습니다. 이승소가 묘지를 짓고, 윤회가 행장을 지었으며, 정인지가 신도비의 글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정인지의 글은 이장할때 원래 능이 있던 곳에 묻어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증호는 영릉(英陵)입니다. 세종은 정비 1명과 5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정비인 소헌왕후에게서 적자 8명과 적녀 2명, 영빈 강씨 등 5명의 후궁들에게서 서자 10명, 서녀 2명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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