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 단박에 읽는 조선왕조사 - 계유정난 김종서와 사육신 김문기 저승동기 성삼문 박팽년 이개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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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 단박에 읽는 조선왕조사 - 계유정난 김종서와 사육신 김문기 저승동기 성삼문 박팽년 이개에 대해 알아봅니다.​

백촌유사_김문기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는 56세, 세종과 이순신은 54세, 영조와 익종의 후비 신정왕후(풍향조씨, 조 대비)는 83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다시 말해 저승동기 들이다.

김종서_수양대군

단종을 보좌했던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는 계유정난(1453.10.10)때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수양은 임운, 양정을 대동하고 김종서를 찾아가 품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서 읽어보라고 한다. 내용은 수양의 막내동생 영응대군의 아내 송씨가 동래 온천에 가서 목욕을 했다하여 양사(사헌부, 사간원)의 대간들이 탄핵한 내용이었다. 김종서가 글을 읽는 순간 임운이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때까지 김종서는 죽지 않았으나, 수양의 졸개 이흥상이 칼을 뽑아 김종서의 목에 꽃았다.

세희공주

피의 숙청에 환멸을 느낀 세조의 맏딸 세희공주는 대궐을 도망쳐 나와 형색이 궁한 '나무꾼 도령'을 만나 평생의 인연이 된다. 그런데 그가 김종서의 손자였으니, 견원지간의 자손끼리 만난 것이다. 이것이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러나 역사는 맏딸인 세희공주는 묻어 버리고 의숙공주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와 결혼) 만 소개한다. 야사집인 서유영의 금계필담에 전해지고, 정인지의 영릉지문에 성명불상의 장녀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세희공주 일듯하다.

백촌 김문기선생

세조하면 사육신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사육신(단종 복위운동 1456년 6월)은 중종때의 사림파에 의해 불리어 졌는데, 조선왕조실록 본문에 최초 등록된 시점은 인조실록으로 인조 1년 7월 27일 을묘 2번째기사(1623년)로 사육신 사후 167년만에 나온 말이다.

김문기,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을 제거하여 그 공으로 경절공신이 되고, 남이를 처형하여 추중정난공익대공신이 된 정창손은 단종복위를 모의한 사위 김질을 설득하여 세조에게 고변케하여 위의 충신들이 극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후 정창손은 영의정 김질은 좌의정까지 된다.

성삼문

1456년 6월 8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二년 六월 八일(병오)조에는 단종의 여러 충신들을 사형한 기술 다음에, 이른바 육신사건을 매듭짓는 글로서 사형(死刑)된 여러분 중에서 특히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류성원 및 김문기 여섯 분을 뽑아 단종 복위모의를 하게 된 동기 및 그 모의내용을 개인별로 기재하였습니다.

이 여섯 분이 원래의 사육신이었던 것입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三問性躁進 自以 重試居魁名在於人先而 久滯於提學參議 其父勝 素昵於瑢 曾爲義州牧使 殺人落職 收告身科田 瑢語其黨曰 勝最附於我 如有變當立我馬前者 乃啓請還給 是語播聞於人 三問以是自疑 ②彭年以女壻瑔故 每懼及 ③緯之嘗被譴 懷怨 ④塏 ⑤誠源 以秩卑 鬱鬱 思欲進達 遂相深結 汲汲往還 情迹詭秘 人皆訝之 ⑥文起 與朴彭年 爲族親 且密交 文起 時爲都鎭撫 與彭年三問謀曰 第汝等 在內成事耳 我在外領兵 雖有違拒者 制之何難」(王朝實錄 七卷 一三五頁 下段 一二行 以下)

 

번역 ①성삼문은 성품이 진달(進達)에 조급(躁急)하였는데,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한 이래로 이름이 사람들에 앞서 있었지만, 오랫동안 제학참의(提學參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아버지 승(勝)이 평소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과 가깝게 지냈었는데, 전에 의주목사로 있을 때 살인(殺人)하여 면직(免職)되고, 사령장(辭令狀)과 과전(科田)이 몰수(沒收)되었었다.

안평대군이 그 당인(黨人)들에게 이르기를 ‘승(勝)은 나에게 가장 가까이 하니 만일 내게 변(變)이 생긴다면 의당 내 말 앞에 서서 변을 막아줄 사람이라.’ 말하고 임금께 아뢰어서 사령장과 과전을 찾아주었다.

이 말이 세상에 퍼지자 삼문은 이때부터 스스로 불안하게 여기어 왔고, ②박팽년은 사위 천[주: 세종왕자(世宗王子) 영풍군(永豊君, 혜빈양씨 3남 )으로 세조 즉위와 동시에 유배됨]의 일로 매양 두려워하고 있었고, ③하위지는 전에 책망 받은 일로 원한(怨恨)을 품고 있었고(세조 즉위 초에서 사형직전까지 이른 적이 있음), ④이개⑤ 유성원은 직위가 얕아서 울울(鬱鬱)하게 지내면서 진달(進達)할 길을 생각한 끝에 서로 깊게 맺어 자주 왕래하면서 그 정적(情迹)을 숨겨왔으므로 사람들이 매양 의아하게 생각하여 왔다.

⑥김문기는 박팽년과 더불어 족친(族親)이면서도 가장 가깝게 지냈는데, 이미 도진무(都鎭撫)로서 팽년(彭年), 삼문(三問)과 더불어 모의하여 가로되, “그대들은 안에서 일만 성사(成事)시키라[주:연회장 내(內)에서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박쟁(朴崝), 삼운검(三雲劒)으로 하여금 하수케 하는 일]. 그리고 내가 밖에서 병력을 동원한다면 비록 거사를 막는 자가 있은 들 어찌 성사하지 못하겠느냐.”하였다.

사건당시 김문기선생은 관련자 중 오직 한분 판서(判書)로서 군(軍) 최고지위인 삼군도진무를 겸하고 있어서 이 사건에 병력동원까지 계획하였던 것이다.

위 왕조실록의 기록은 七일간에 걸친 조사결과를 사관(史官)이 총평(總評)하여 매듭지은 글입니다.

세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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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6월 9일 반포된 교서를 보면

"지난번에 이용(李瑢)<안평대군(安平大君)> 이 모역(謀逆)할 때, 널리 당파를 심어 중외에 반거(盤據)하였으므로 흉포한 도당이 진실로 많았지만, 내가 차마 모조리 처벌하지 못하고 그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문에 부쳤는데, 남은 도당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서로 이어서 난(亂)을 도모하므로, 그때 그때 주륙(誅戮)하여 제거하였으나, 근자에 또 여당(餘黨) 이개(李塏)가 흉악한 마음을 품고 감정을 풀고자 하여 난(亂)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그의 도당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박팽년 동생>·허조(許慥)·박대년(朴大年)<박팽년 동생><도당 10명 문신> 같은 악당으로 서로 선동하여, 장신(將臣)인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이유기(李裕基)<이개 사촌동생>·이의영(李義英)<별시위- 국왕의 측근 시위병, 종4~종9품, 유응부 사위>·성삼고(成三顧)<장신 9명, 무신 우익> 등과 비밀히 결탁하여 우익(羽翼)을 삼고, 권자신(權自愼)·윤영손(尹令孫)<단종의 이모부>·조청로(趙淸老)·황선보(黃善寶)·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권저(權著)<연통 7명, 음관>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禁)에 연통하고,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날짜를 정해 거사(擧事)하여서 장차 과궁(寡躬)<임금이 자기를 일컫는 말> 을 위해(危害)하고 어린 임금을 옹립하여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흉포한 모략과 간악한 계략을 꾸며 그 죄역(罪逆)이 하늘을 뒤덮었다.

라고 하여 사건을 총정리 했다.

 

성삼문 (1418년생~1456.6.8) 은 창녕성씨로 성격이 곧고 기개가 높았다.

둥둥둥 북소리는 사람의 못숨을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을 걸 생각하니

이내 몸 오늘밤은 뉘 집에서 제워줄꼬

성삼문

 

박팽년

박팽년(1417년생~1456.6.7전)은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의 아들이자 세조(1417년생~1468)의 후궁 근빈 박씨(80세 이후까지 생존, 연산군 때 수모당함, 장남 덕원군1449~1498-경주 김씨 김종직의 사위, 차남 창원군1458~1484-교화 노씨 노호신의 사위) 가 누이로 추정된다. 세조는 그를 회유하려고 노력했으나 옥중에서 죽고 만다. 박팽년의 아들 박순 아내가 임신중이라 여종과 사내를 바꿔치기해 여종 손에 키워졌으며, 박비가 장성하자 박순의 동서 이극균은 조카인 박비에게 자수를 권하여 성종은 이를 용서해 주었고 그후 이름을 박일산으로 고쳐 대를 잇는다.

금생려수라 한들 물나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라 한들 임마다 좇을쏘냐

박팽년

 

이개 묘비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월광명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개 (1417년생~1456.6.8)

 

함길도에서 단종 폐위(廢位, 1455년 윤6.11, 세조에게 선위, 혜빈양씨 귀양)의 소식을 들으시고 함길도 절제사 김문기 (1399년생?~1456.6.8) 선생이 쓰신 ‘방백한시(放白鷴詩)는 단종에 대한 선생의 단심(丹心)이 잘 나타나 있다.<사육신 사건 1년전 단종 폐위>

그대는 새장 속의 새이고 나 외로이 갇히어,

해 저문 창가에서 시름을 같이 하네

어찌 구름 밖 천리를 날고 싶지 않으랴만,

장 속에서 헛되어 십년 세월을 버리는구나

 

고향은 멀리 하늘 끝에 아득하고,

벽해는 아스라이 땅 끝에 망망하니

함께 가고파도 갈 수 없는 몸이기에,

차디찬 눈보라를 견디어 머무리니

김문기 방백한시

김문기 사육신 묘

정치와 권력은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빠지면 그 영화를 끝까지 누리고 싶어한다. 권력을 향한 정략과 모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아쉬워 할때 물러설줄 알아야 떠나는 뒷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삼지론을 익히자. 지지(멈춤), 지분(분수), 지족(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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