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2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태종의 대마도정벌의 허와실, 박위 김사형 이종무 박실 이순몽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2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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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12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태종의 대마도정벌의 허와실, 박위 김사형 이종무 박실 이순몽에 대해 알아봅니다.

대마도 정벌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중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대마도)을 정벌한 사건입니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위가 이끌었으며,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 1년)에 이종무가 이끈 정벌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일본어: 応永の外寇)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일본어: 糠嶽戰爭)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위 장군

제1차 정벌

1389년(창왕 2년) 음력 2월에 박위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구출하였다.

 

제2차 정벌

1396년(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제3차 정벌

세종(1397.4.10 ~1450.2.17 재위기간 1418.8. ~1450.2. 31년 6개월) 치세 기간중인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충청도 비인(서천군) 도두음곶에 나타나 약탈을 일삼게 됩니다. 이에 군 통수권을 지닌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왜구의 침략 : 왜구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대마도를 근거지로 우리나라와 중국 근해를 약탈하던 일본 해적을 가르키는 말이다.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가장 심했는데 고려말 40년간이 특히 심해 고려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때 왜구가 처음으로 침입한 것은 1223년 이었으나, 공민왕때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더욱 심해져 동해, 서해, 남해, 내륙까지 침범하였다. 우왕때(1378. 4. 개경 침략) 특히 심해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왜구의 침략을 받았을 정도다.

황산대첩 :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黃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19.5.14일 태종은 유정현, 박원, 이원, 허조, 조말생등을 불러 쓰시마섬을 정벌하기로 합니다. 출정식은 6.17일 거제도에서 거행되었고, 정벌을 위해 이종무<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는 태종의 편에 서서 이방간의 군사를 제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 공으로 4등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승승장구했다>를 삼군 도체찰사로 삼아 병력 17,285명 227척의 군선과 65일분의 군량을 싣고<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있었음> , 6월 19일 출발 6월 20일 쓰시마섬에 도착하여, 왜구 선단 129척을 불태우고 집 1,939채를 불지르고 왜구 114명을 사살합니다. 중국인 포로 131명도 구해냅니다.

그러나 숨어들은 왜구를 토벌하고자 좌군절제사 박실 등이 깊숙히 습격하였으나 반격을 받아 관군 180명이 사망합니다.

우군절제사 이순몽 및 김효성이 승전을 거두자 대마도주 옹화가 10여명의 부하와 항복하고, 10일만에 귀국합니다.

7월 17일, 조선 조정은 대마도 측에 항복을 요구하는 서계(書契)를 발송하였습니다. 이후 한동안 항복 조건과 전후 처리에 관한 교섭을 거친 후 1420년(세종 2) 1월에 최종적으로 양측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습니다. 첫째,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로 경상도 관할 하에 놓이며 경상도관찰사를 통해 조선 조정에 서계를 올릴 것, 둘째 대마도에서 요청한 인신(印信)을 하사할 것, 셋째 대마도에서 보내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참할 것. 즉 조선 정부는 대마도 측의 경제적 요구를 어느 정도 해결해 주는 선에서 그들을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후 100년간 조선은 왜구의 횡포에서 벗어납니다.

세종은 왜구의 노략질을 억제하기 위한 유화책으로 1426년(세종 8) 에 제포·부산포·염포 등 삼포를 개항합니다. 이는 살 길을 열어달라는 대마도 도주의 호소를 받아들인 조치로, 삼포에 왜인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무역을 허가했습니다. 또한 어로세(漁撈稅) 를 내고 남해안 일대에서 조업하는 것도 허용했습니다.

대동여지전도_쓰시마 포함

허조(1369~1439, 공민왕 18년~세종 21년)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1390년(공양왕 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조선 개국후 예약제도를 바로잡는데 힙썼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지평(정5품)으로 발탁되어 소신있는 직언으로 완산(전주) 판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태종은 그의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인정하여 직현전 직제학(종3품)으로서 세자강원좌문학(정5품)에 등용됨. 1411년 예조참의(정3품)가 되어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정하는데 크게 기여함.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모든 예악제도의 정비는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조말생(1370~1447, 공민왕 19년~세종29년) : 조선 초기의 문신. 1401년(태종1년)에 증광문과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1407년 문과중시에 2등 급제로 예문관 직제학(정3품) 역임. 세종 즉위년인 1418년 이조참판(종2품), 형조판서(정2품), 병조판서(정2품) 역임. 1419년 대마도 정벌시 병조판서로 대마도정벌에 찬성함. 그 뒤 함길도관찰사(종2품), 대제학(정2품)을 지내다가 1446년 영중추원사(정1품, 세종때 최윤덕 최초) 역임. 말년에 부정축제 뇌물 780관(허용 80관)으로 직첩회수 되고 충청도 회인에 부처됨.

출처 입력

왜구의 침입로

박실(?~1431, ?~세종 13년) : 조선 초기의 무신. 아버지 박자안도 무신이자 좌군도총제를 지냄. 본래 무예가 뛰어나지 않았음. 참형을 당하게 된 아버지 구명운동을 벌여 태종이 그를 1402년(태종 2년)에 근위병으로 채용해 벼슬길에 오름. 1414년 예조참의(정3품), 1417년 경상도 수군도절제사, 좌군동지총제, 중군통제 등을 역임하다가 1419년 대마도 정벌시 좌군도절제사로 참가함. 17급을 베는 공을 세워 세종으로부터 어의 한발 하사받음.

이순몽(1386~1449, 우왕12년~세종31년) : 조선 초기의 문신. 1405년 음보로 벼슬기에 오름. 1417년 무과에 급제. 1418년 의용위절제사, 동지총제가 되어 1419년 대마도 정벌시 우군절제사에 임명됨. 박실등이 크게 패한데 비해 이순몽이 김효성과 함께 대승을 거두자 대마도 도주 옹화가 화친을 제의함. 1433년에는 중군절제사가 되어 북쪽 파저강의 야인인 이만주를 토벌하는등 큰 공을 세움. 이에 세종은 노비와 의복을 상으로 내리는등 크게 신임함.

 

이종무는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대신들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종무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태종과 세종은 잘 싸웠고 대마도주의 화해도 받아냈다며 그의 목숨을 살리고 유배형에 처합니다. 이듬해 이종무는 관직에 복귀합니다. 이종무는 세종의 신임을 얻어 1424년 사은사로 중국에 들어갔으나, 함께 갔던 권희달이 명나에 큰 실수를 하여 이종무도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를 갑니다. 1425년 그의 직첩과 전답을 돌려주었고, 그해 7월 6일에 66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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