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 - 만고의 충신 백촌 김문기 선생 프로필

2023. 11. 28. 18:24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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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의 충신이자 사육신의 좌장 김문기 선생의 일생과 조선전기의 청치상황을 연재합니다. 
연재 1 - 만고의 충신 백촌 김문기 프로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출생 연도 1399년(정종 1)  사망 연도 1456년(세조 2)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
주요 관직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형조참판, 공조판서
초명은 김효기(金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김관(金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6>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사관>,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2>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 · 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김문기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항산집>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 민신(閔伸) · 조극관(趙克寬) · 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 · 박팽년 · 이개(李塏)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 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김문기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김문기(金文基 1399년 ~ 1456년)는 삼중신의 한 사람인데 한때 사육신 초명은 효기(孝基),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혹은 마암(馬巖), 김녕 김씨(金寧 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조선의 문신이며 단종의 충신 즉, 삼중신 중 한명이다.
현재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가묘가 설치되어 있다.
 
< 생애 >
김문기는 1399년(정종 초년) 2월 13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사단동에서 출생(효자동),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관직에 임명되지 않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9>·사간원 좌헌납<5>, 병조정랑, 경상도아사, 경창부소윤, 의정부사인, 봉상시윤, 함길도 도진무(都鎭撫)<2>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승문원판사,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겸지병조사 · 병조 참의<3>, 좌부승지, 함길도관찰사 · 형조 참판<2>, 함길도절제사 등을 지냈다. 처음 이름은 김효기(金孝起)였으나, 장인의 이름이 효정(孝貞)이어서 문기로 고쳤다.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金觀)이 아버지이고, 그의 아들 김현석(金玄錫)은 영월군수로 재직 중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공조판서<2>겸삼군도진무<2>로 있으면서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김질,정창손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자 김문기를 비롯하여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등은 체포되었으며, 유응부는 자결하였다.
 
< 상훈과 제향 >
1731(영조 7) 김문기의 후손 김정구의 청으로 복관되었고, 1778(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실록> 1791(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었다.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 · 김경남(김문기의 증손) · 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각 등 5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
 
< 가족 관계 > 6남 1녀
원조부(8대조): 김시흥(金時興)<김녕 김씨의 시조로, 경순왕의 7대손이라 한다>
현조부: 김중원(金重源)
고조부 : 김현(金峴)
증조부 : 김광저(金光儲)
조부 : 김순(金順, 1341~?) - 1376년(우왕 2) 문과 급제, 호조 판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부친 : 김관(金觀) - 이조 판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모친 : 정경부인 옥천 육씨<도순찰사 육비(陸埤)의 딸>
계모 : 순천박씨<박중림 누이, 박팽년 고모 추정, 1411(문기 13) 들임>
서숙부 : 김구수(金仇守)
서숙부 : 김개질지(金介叱知)
부인 : 선산 김씨 봉비(奉非) 장릉등록<1418년 문기 20세때 대제학 김효정의 딸>, 조선왕조실록 세조편 "난신의 부녀자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라."에 기록이 전함, <김봉비-김효정(대제학 정2)의 딸> -> 도절제사 유수 정속
<김효정은 일찍이 생원시에 급제하고 1402(태종 2)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5위로 급제한 뒤 1427(세종 9) 중시(重試) 문과에 을과 26위로 급제하여 대제학<2>에 오른 인물이다>
제(弟) : 김정기(金鼎起)<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
제(弟) : 김득문(金得文)<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
아들 : 김현석(金玄錫)<1420년 출생 김녕김씨 대동보, 세종2년 경자>
며느리 : 전처 오씨, 교리<5> 오명호의 딸, 후처 권영금(權英今)<부친 권담,아우 권총, 전처 박씨(병조판서 박습의 딸)-노비전락, 강제 이혼> <강상인, 박습, 심정->상왕 태종이 처형, 세종 장인 영의정 심온 처형> <권담 - 조부 대제학<2> 권근, 부 권규(권규는 결혼 후 태종의 부마로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가 1416년 길창군(吉昌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모 경안공주(조선 제3대 왕 태종의 셋째 공주.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고 세종대왕의 손위 누이이다> 장릉등록->권람(이조판서) 정속
아들 : 김인석(金仁錫) 김원석(金元錫) 김의석(金義錫) 김정석(金正錫)
아들 : 김현동(金玄仝)
사위 : 박장윤(朴長胤)-이조 정랑 황효원, 좌랑 윤자운이 탄핵(무 천거)
사위 : 성주 이씨 이번(李蕃)<음위(발기부전), 아비 이효경(풍질,미친병), 어미 설씨(판사-1품 설존의 딸)士人 김한과, 매서(이효경 동서) 순평군 이군생(정종 차남, 숙의(2) 기씨 장남)과 사통, 종 불로(제주로 도망)와 간통>
고명딸 : 김종산(金終山)->최항(대사헌) 정속 족보 기록에는 존재 하지 않으나 "金 文 起 女 終 山"으로 장릉등록, 조선왕조실록 세조편 "난신의 부녀자들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라."에 기록이 전함.<임중경(대물), 여종, 판종부시사 황보공 딸(처녀), 전 녹사 황인헌 딸(처녀) 간통후, 김종산이 임중경과 사통>
사위 : 남평 문씨 문절(文節)
사위 : 하양 허씨 허연령(許延齡)<부친 허조(許慥, 이개 매부), 조부 (許詡, 큰아버지 출계)>
단종사화 이후 부녀자와 나이어린 자손들은 노비로 보내진뒤 실종 되어 족보에 기록이 전하지 않아 묘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으나 족보 기록에 있는 김녕김씨 충의공파 12세손 "김명지"의 실전된 묘를 충북 옥천군 양산면 죽산리 오정 저수지 옆의 산에서 묘를 찾았고 묘가 위치한 산에서 총 15기 정도의 묘를 발견 하였고 인근산에서 족보 기록에 있는 김문기의 동생인 김정기의 묘로 추정되는 곳을 함께 발견 하고 "옥천문화 2021"에 "옥천 죽항촌 후곡 지명고증 연구" 라는 글에 위치 기록을 남김.
< 저서 >
《백촌유사》 (白村遺事,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김문기의 유사를 모아 편찬한 책)
《백촌선생문집》 (白村先生文集, 김문기의 시문집으로 1928년에 후손 김연석(金淵錫) 등이 간행)


김문기
[ 金文起 ]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출처디지털대구문화대전-김문기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금회영각에 영정이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광저(金光儲)이고, 할아버지는 호조 판서를 지낸 김순(金順)이다. 아버지는 호분시위사 좌령 사직(虎賁侍衛司左領司直)을 지낸 김관(金觀)이고, 어머니는 옥천 육씨(沃川陸氏)이다. 부인은 이조 판서를 지낸 김효정(金孝貞)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선산 김씨(善山金氏)이다.(봉비)
활동 사항
김문기(金文起)[1399~1456]는 1399년(정종 1) 충청도 옥천군 사단동(社壇洞)[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30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1436년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을 거쳐 1439(세종 21) 경상도 아사(慶尙道亞使)로 대구에 부임하였다. 재임 중 금호강이 바라보이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일대 언덕에서 소요(逍遙)하였다고 한다. 1445년(세종 27) 함길도 도진무(咸吉道都鎭撫)<2>, 1448년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1450년 병조 참의, 1451년(문종 1) 함길도 관찰사, 1453년(단종 1) 형조 참판, 1455년(세조 1) 공조 판서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일으킨 단종(端宗)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고를 엮은 6권 3책의 『백촌 선생 실기(白村先生實記)』가 전한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역사 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31년(영조 7) 복관(復官)되었으며, 1778년(정조 2)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됨과 동시에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 단종의 무덤인 장릉(長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의 섬계 서원(剡溪書院),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의 오강 서원(五岡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산노리의 효암 서원(孝巖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대사리의 덕양 서원(德陽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 김문기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금회영각(琴回影閣)이 건립되어 있다. 봉안된 영정은 1451년 김문기가 함길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명나라 화사(畵師) 공손급(公孫汲)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금회영각은 1900년(고종 37) 김문기의 후손과 달성군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 김녕 김씨(金寧金氏) 일족이 의논하여, 김문기가 대구에서 소요하던 금호강 인근에 건립한 것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백촌선생실기(白村先生實記)』
『김녕 김씨 대동보』(김녕 김씨 대동보 편찬 위원회, 1990)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네이버 지식백과] 김문기 [金文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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