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양양부사 류자한에게 보내는 진정서와 이이의 김시습전을 통해 본 금오신화의 저자 생육신 김시습 연구 2

2024. 1. 3. 06:1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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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 양양부사 류자한에게 보내는 진정서와 이이의 김시습전을 통해 본 금오신화의 저자 생육신 김시습 연구 2

 

조선 최고의 천재이자 기인이며 시대의 반항아 그리고 유불선 통달, 전국 각지 방랑자이자, 시인, 소설가인 김시습에 대해 알아봅니다.

◆ 김시습전(1435~1493)은 선조의 명으로 율곡 이이(1536~1584)가 100여 년 전 김시습의 일대기를 기술한 것으로, 김시습의 호는 설잠, 청한자, 동봉, 벽산청은, 췌세옹, 매월당 등으로 풍채가 없는 데다 키도 작았지만 성격이 호탕하여 재주가 뛰어났으며, 소탈하고 위엄을 부리지 않았지만, 성질이 굳세고 곧아서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의 행태에 분개하다가 심기가 답답하고 편안치 못하자 스스로 세상을 따라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 몸을 내던져 세상 밖에서 놀았다. 그는 활달한 기상과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스스로 펼 길이 없어 모든 것을 글로 썼다. 그의 문장은 물처럼 용솟음치고 비바람같이 일어나며, 산처럼 깊숙히 간직되고 바다처럼 넓게 적셨다. 자질구레한 글 솜씨를 가진 자들이 발돋음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선가 도가의 사상에도 막힘이 없었고 학문이 조예가 깊어 그이 칼날 같은 말과는 겨룰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달아났다. 그러나 유교에 마음을 두면서도 불가에 몸을 맡기고 있었기에, 당시에 괴이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서 일부러 미친 짓을 하면서 자기의 참모습을 가렸던 것이다. 친구이자 당대 재상이었던 서거정과 김수온과의 일화는 그의 올곧은 성품을 드러낸다. 또한 영의정 정창손을 욕보인 행동은 모든 선비들과 절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다만, 종실의 수천부정(종3품) 이정은과 남효온 안응세 홍유손 등 몇 사람만이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류자한이 양양부사로 있을 때 예절을 갖추어 시습을 대접하고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나 천년 뒤에 저의 본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라며 거절한다.

1493년(성종 24년) 무량사에서 병들어 죽으니 59세였으며 유언에 따라 임시로 절 곁에 묻어(유교식 초분으로 추정됨) 두었다. 삼 년 후 장례를 지내려고 하자 얼굴빛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불도들이 매우 감탄하여 그를 부처로 여겨 불교 의식에 따라 다비하고 그 뼈를 찾아 부도를 만들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직접 초상화를 그리고 화상찬까지 써서 절에 남겨두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림이 그것이다.

그가 남긴 시문은 흩어져 십분의 일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이자(1480~1533), 박상(父 박지흥-사돈 권람, 형 박정, 당시 전라도관찰사 김종직, 광주 송정골출신, 1474~1530), 윤춘년(1514~1567) 등이 수집하고 인쇄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율곡 이이는 서평으로 쓰기를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장을 선천적으로 얻고 태어났으니, 이를 미루어 본다면 문자에서 또한 생지(生知)가 있는 셈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하여 살았던 속마음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가 반드시 명교(유학)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제멋대로 노닐었던 것은 어째서 엿겠습니까? 그의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나 스스로 지킬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기운이 가볍고 맑은 쪽으로는 풍부하였지만 두텁고 무거운 쪽으로는 인색하여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는지요.

곧은 말과 준엄한 의논은 남들이 꺼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삼공을 비웃으며 육경을 꾸짖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잘못을 문제 삼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선왕들의 크신 덕과 재상들의 넓은 도량 때문이었습니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성균관사 동지춘원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臣) 이이는 교지를 받들어 올립니다.’

 

한때 불가에 귀의했다가 선조대 이조판서를 지낸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은 김시습에 대한 정확한 인물탐구와 평을 했다고 본다.

◆ <매월당집> 의 편찬과 간행

·김시습의 시집은 주제별로 편찬되어 시를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가 없다. 그런대로 창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한 권으로 묶은 기행 시집의 경우이다.

·<유관서록>은 21세에 지은 시부터 실려있다. <유관동록>은 26세 이후에 쓰인 걸로 보인다. <유호남록>은 27세 이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매월당집>은 모두 23권으로 1권에서 15권까지는 시집이며, 16권부터 23권까지는 문집이다. 그가 지은 시는 수만 편에 이르지만 흩어져 버려 조정의 신하와 선비들이 몰래 자기 작품으로 만들기까지 했다고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 기록하고 있다.

·매월당 문집을 간행하자는 주장은 중종대 이세인(1452~1516)인데 실제로 간행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와 별도로 이자(148/0~1533)가 매월당의 시와 문장을 모아 <매월당집> 세 권을 엮어서 자신의 서문을 실었고, 그 뒤 박상(1474~1530)과 윤춘년(1514~1567)이 다시 편찬하였으며, 선조가 <매월당집> 간행을 명하여 이자와 이산해의 서문, 윤춘년과 율곡의 <김시습전>을 덧붙인 <매월당집>이 1583년에 간행되었다.

<매월당집>은 일본 호사문고에 완질이 보존되어 있다.

<금오신화>는 일본에서 1653년에 히야시라잔이 한문을 일본식으로 읽기 편하게 표기한 훈점본이 처음 나왔고, 1660년 번각본이 다시 나왔다. 이판이 200년 넘게 오츠가 집안에 전해 오다가, 1884년 도쿄에서 한일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하 2책으로 간행하였다. 상권은 32장인데 서 <매월당소전>,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가 실려있고, 하권은 24장인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발문, 평이 실려있다. 하권 끝에 이 책을 갑질이라고 표시한 것을 보면, <금오신화>가 본래 다섯 편이 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 판본은 조선에서 윤춘년이 편집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한 목판본이다.

 

조선조 풍운아 김시습은 어릴 적 세종대왕의 은총을 받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세조의 단종 폐위 및 단종 복위 운동인 사육신 사건을 보면서 벼슬길에 오를 뜻을 접고 전국의 명산과 고적을 탐방하여 많은 산수기와 산수시를 창작하고 이러한 창작이 <금오신화>에 그대로 수용되어 자연 배경에 대한 실경 묘사를 향토적이며 민족적으로 기술하여 전기소설에 선보이고 있다. 어딘가에 남아있을 을 질, 병 질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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