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넝마로 만든 푸른 꽃 2 성냥 한 개비의 사랑

2023. 12. 18.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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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 넝마로 만든 푸른 꽃 2 김승희. 성냥 한 개비의 사랑

 

신이 인간을 위해 사방에 구원의 출구를 열어 놓았는데도 자신의 무지와 아집에 사로잡혀 닫힌 출구만을 두드리면서 감각과 본능대로만 살려고 하는 길이 막힌 인간들, 희망적인 삶을 위하여 보다 행복한 지혜를 위하여 우린 보다 지성을 갖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출구없는 불행이란것도 우리의 방향 상실에서 오는 무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햇빛 아래서 사람이 힘써 하는 모든 행동은 그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있으랴? 세상은 가고 세상은 온다. 땅은 영원히 존속한다. 앞서 있었던 자의 후에 있는 것이다. 태양 아래에는 새로운 일은 없는 것이다. -솔로몬의 허무

고운 삶이란 오복<수(壽), 부(富), 강령(康寜),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두루 타고나 곱게 주어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험한 삶의 조건들을 나의 지성과 나의 사색으로 어떻게 곱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험한 세파를 자신의 힘으로 아름답게 견디어 냈을 때 연꽃처럼 험한 늪 속에서 꽃 피어나는 고운 깨달음의 부드러운 미소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고운 삶이 아닐까?

가난한 부자는 없고 부유한 거지만 많은 사회 이것 역시 현대인의 정신적 병리 현상의 한 징후가 아닐까?

소년 의식은 피터팬 신드롬이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큰 이익을 버려 과감한 박애주의적 행위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이익에는 소름 끼치도록 집착하는 추악한 동물성을 버리지 못하는 본성 모순을 지니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항시 종교적인 양심을 지니고 자신을 채찍질해 나갈 때만이 자신의 내부에 깃든 동물적 욕심을 조금이라도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노출 노이로제는 이중성의 분열이다.

생텍쥐페리의 말대로 사랑이란 '둘이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병은 육신의 장애일 뿐 영혼의 장애는 결코 아니다.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갈 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갈아준다. 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견디는 사람은 더욱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성장한다. -힐티 '서서 버티는 나무’

성냥 한 개비의 사랑. 겨울만이 추운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계절이 춥다. 노년만이 추운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춥다. 성냥 한 개비를 주는 사람은 생명 전체를 선물하는 사람이다.

제자리걸음의 장거리 여행이 삶이다. 상상 속의 여행, 단풍 가을바람의 뱃길, 산 내음 물보라 이 모든 것이 삶이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은 하늘의 문이다. 벽은 움직이지 않는다. 벽은 내 작은 힘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벽이 창문이 될 수는 없는 현실.

우리 시대는 실신 시대야. 어떤 의미에서 정신 나간 사람들이 득세하고 정신이 나가야만 더 사회를 수용할 수 있게 돼 있단 말이야. 제정신 가진 사람 일단 어떻게든 뇌를 마비시키고 실신케 해야만 가동되는 시대, 그게 현대문명의 속성이 아닐까? 물신숭배, 마비의 시대 그리고 출세주의 기회주의 성공 주의자만이 사는 위장된 곳에선.

버릴 것은 버릴 줄 알면서 살아야 하겠다. 너나없이 살기 등등 출세 제일주의, 황금 만능주의, 소비 미덕 주의 극도의 물질 탐욕적인 현세주의로 치닫는 것이 오늘날의 물결이고, 미래의 물결이라면 우리는 모두 똑같이 바보가 되어야 할 것인가? 마음이 없는 가짜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 이런 시대이니 만치 세상이 변해야 하는가? 인간이 변해야 하는가?

항상 임종처럼 사는 것. 끝을 아는 겸손으로, 끝에선 열정으로 끝을 맛본 것 같은 진짜 성실함으로 순간순간을 산다면, 선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결국 악업을 짖지 않고 수도 정진하여 반야를 깨우치는 불교의 죽음관 과도 통하는 것 같다. 선종하고 싶다. 한 사람을 알려면 관 뚜껑을 덮어봐야 안다고 한다.

여성들이 해방을 지향하는 진정한 목표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즉 여성 자신의 내부, 자신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은 지나치게 의존적인 신데렐라적 환상에 빠진 사람은 이중의 멍에를 지게 된다. 그것은 타인(남자)에 대한 환멸과 실망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포기한 일에 대한 미련과 공포라는 것이다. 여성 위기의 시대.

대형화 집단화된 사회 속에서 이제 자기 자신만의 꿈의 순결성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사투에 가까운 일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회일수록 자신만의 정신적 독창성 영혼의 순결성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타락하고 오염된 시대라 하더라도 어찌 내 얼굴이 빠지고 없는 단체 사진을 내 사진이라고 우길 수 있으며, 상업주의적 대중문화를 나의 문화라고 내세울 수 있으랴?

나의 문화를 창조하려는 성실한 노력, 거기에 나만의 꿈의 순결성이 깃드는 것은 아닐까?

자판기 시대의 자기 실종, 획일주의적 문화 감각, 개성, 자기 문화, 창조적 고통.

취한 세상 속에 제정신 찾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락, 일단 멈춤, 붉은 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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