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금남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일본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근대 이전 중국 3대 여행서로 손꼽습니다.

2024. 1. 19.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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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이동경로

연재 2 금남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일본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근대 이전 중국 3대 여행서로 손꼽습니다.

 

표해록은 조선 성종때 제주도 추쇄경차관 최부(1454~1504)와 그 일행이 중국으로의 표해과정과 국내로 송환되기까지 최부 일행이 관찰하고 경험했던 153일간의 일기입니다.

최부는 1487년(성종 18년, 34세) 1월에 홍문관 부교리<종5품>로 임명되고 점필재(김종직) 및 벗들과 용산강을 유람했으며, 7월에 용양위사가 되었다가 곧 부사직<종5품> 이 되었으며, 9월에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갑니다.

1488년(성종 19년, 35세) 1월 30일에 가노 막금으로부터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에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여 명의 절강성 우두외양에 이르렀고, 태주부 임해현(台州府臨海縣)에 도착하여 영파, 항주, 소주, 북경을 거쳐 6개월 후에 귀국하기 까지 8천리에 달하는 긴 노정을 여행했습니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그는 상신(喪身)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최부의 표류와 송환과정은 중국의 지리와 역사, 산물, 풍속 등을 장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상중임에도 명을 내려 '증조견문일기' 라는 여행기를 찬진하게 됩니다.

이 책은 중종 연간에 다시 '표해록'으로 간행되고, 외손인 유희춘이 1569년(선조 2년), 1573년(선조 6년) 정주와 남원에서 표해록을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알립니다.

일본에서도 1769년 청전군금에 의해 '당토행정기'라는 명칭으로 번역됩니다.

1487년 9월 17일 홍문관 부교리였던 최부는 제주 3읍(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추쇄 경차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제주 인구는 세종때 18,897명 이었으나 성종때 9,400여명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에 양민의 추쇄와 종마의 보급에 힘쓰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종은 당시 전라도 관찰사이자 스승인 김종직에게 최부를 도와 추쇄를 원할히 하도록 하였습니다.

< 노정 >

1488년 윤1월 3일 출항하였습니다. 최부 일행은 종자, 군관, 선원, 호송원, 관노등 총 43명으로, 최부가 육지에서 데려간 종자 7명을 제외한 35명은 모두 제주도 출신이었습니다. 제주목사 허희는 바닷길이 멀고 해적의 출몰을 우려해 중선규모의 50인승 배와 제주 출신 호송인들을 배려하였습니다.

출발은 순조로웠으나 추자도를 넘자 물살이 급해지고 하늘이 컴컴해졌습니다. 1월 4일 우박이 쏟아지고 태풍이 불면서 표류하게 됩니다. 표류한지 10흘만에 영파부 하산 즉 주산열도의 큰 섬에 도착하여 섬 사람들의 안내로 밥을 지어먹고 휴식을 취했으나, 새벽에 해적으로 돌변해 약탈당합니다. 다시 바다에 정처없이 서진하다 윤1월 16닐 태주부 임해현 우두외양의 바닷가에 도착합니다. 17일 새벽 6척의 배가 나타나 최부 일행을 포위하고 물건을 약탈 당합니다.

무안 늘어지마을 최부 벽화

납치 위기를 느끼자 최부 일행은 적선의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몰래 배를 버리고 육지로 탈출합니다. 후에 알았지만 이들은 군인으로 왜구로 몰아 일행을 죽여 전공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최부는 표류중 일행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명령을 듣지 않자, 배가 튼튼하니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잠잠해지면 다른 나라에 표류하여 살 수 있다고 설득하고 군인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줍니다. 또한 죄 없는 사람을 물에 빠져 죽게할 수 없다며 자신에게만 처벌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체감을 갖게 되고 점차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후 육지에 상륙한 최부 일행은 절강 해변을 지키는 위소 군병들에 의해 절강성 관내로 압송되고, 윤1월 21일 도저소에소 유택의 신문을 받고, 2월 4일 소흥부 홍종, 오문원, 진담등에게 합동조사를 받습니다. 2월 7일에서 9일까지 항주에서 절강성 최고 권력자 태감 장경의 조사를 받고 최종적으로 왜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귀환 방침이 정해 집니다.

이에 송환절차에 따라 소주를 거쳐 양자강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릅니다. 이후 북경에서 다시 예부와 병부에서 마련한 송환절차에 따라 광녕을 거쳐 6월 4일 귀국합니다.

곡강 최부길

제주도민은 표류한 책임을 최부가 무등산과 금성산에 산신제를 지내지 않았고 출항할때 제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으나, 최부는 원인이 산신제가 아니라 기후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인간의 운명은 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성과 노력 선한 행위를 통해 결정된다는 유교적 문명관의 반영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선공후사의 선비정신과 죽음을 당해서도 도리를 굽히지 않고 예를 지키려고 했던 강인한 사림의식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무등산은 통일신라때 소사, 고려때 잡사, 조선때 읍제를 지냈으며, 1273년 삼별초 진압시 무등산의 음조를 입었다고 조정에서 무등산에 작호를 가봉하였으며, 1281년 충렬왕 제2차 일본원정때 광주출신 김주정이 무등산에 제사를 올리니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금성산 또한 고려시대때 송악과 버금가는 신앙대상이었으며, 태조 왕건이 오다련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그의 아들 왕무가 혜종이 된 자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남사림의 유학자인 최부와 전라도관찰사 김종직은 평소 목격해왔던 불교와 음사의 폐단을 물리치고 민심을 바로잡을것을 조정에 건의하였습니다.

                                                                                      영산강 느러지

최부는 사후 2년이 지난 중종 반전(1506년) 이후 사후 복권되어, 승정원도승지<정3품>추증되었으며, 그를 추모하기 위해 2002년 7월에 중국 영해현 월계촌에 "최부 표류 사적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은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금속활자 및 목판본으로 여러차례 간행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부 간행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유통되었으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간행되었습니다. 또한 《통속표해록》이라는 번역서가 제작되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최부 묘지_늘어지 마을

현대의 역사가들 또한 그의 기록을 활용하는데, 이것은 그의 여행기가 15세기 중국 문화를 외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일한 기록이며 중국의 도시들과 지방 마다 드러나는 차이점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록에 드러난 입장과 태도는 15세기 조선 지식인의 성리학적 관점을 드러내며, 그는 중국 문화가 조선의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중국의 도시, 사람, 관습, 요리, 대운하를 통한 상업적 교류에 대한 그의 설명은 15세기에 중국인의 일상 생활과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의 차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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