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3 녹담거사 장한철 표해록 3 유구열도(琉球列島)에 표류하면서 겪었던 제주선비의 구사일생 표류기를 한문으로 기록한 기행문학, 해양문학, 서사문학 입니다.

2024. 1. 20.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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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3 녹담거사 장한철 표해록 3 유구열도(琉球列島)에 표류하면서 겪었던 제주선비의 구사일생 표류기를 한문으로 기록한 기행문학, 해양문학, 서사문학 입니다.

 

장한철(張漢喆ㆍ1744∼?) 《표해록》(漂海錄)은 1770년제주 출신 선비였던 장한철이 과거를 보러 배를 탔다가 폭풍으로 표류해 1771년에 귀국하기까지의 경험을 쓴 기록입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지정문화재입니다.

영조 46년(1770년) 10월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북제주군 애월읍 애월리 출신 장한철은 마을 부로(父老)의 권유와 관가의 원조로 1770년 12월 25일 김서일 등 일행 29명과 함께 회시를 치르기 위해 한양에 과거 길을 떠났습니다.

장한철등은 배에 올랐으나 곧 폭풍을 만나 온갖 고초를 겪고 류큐국(유구국)이 있었던 유구열도(琉球列島)에 표류, 왜구의 수탈, 안남 상선의 구조와 2차 표류, 전남 청산도 표착과 섬 주민들의 도움속 체류 등 여러가지 사건을 겪은 후 한양에 올라가 과거 시험을 치르고 1771년 5월 제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표해록 속 여정과 주요 체험>

  • 여행준비(1770년 10월) : 향시 합격 후 서울로 올라가 시험을 치르도록 사람들 권유, 관가에서 여비를 주어 회시에 나가게 함, 김서일과 같이 가기로 약속함.
  • 출항과 1차 표류(1970.12.25~12.27) : 1770년 12월 25일 출항, 총29명,고래 출몰, 노화도 인근에서 표류 시작. 소안도 및 유규국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함.
  • 호산도 표착과 체류(1770.12.28~1771.1.1) : 1770년 12월28일 유구 호산도 표착, 전복, 조개등을 채취해서 먹음.
  • 상선의 구조와 2차 표류(1771.1.2~1.5) : 1771년 1월 2일 안남 상선의 구조, 명나라 유민과의 대화, 상선구경, 1771년 1월 5일 안남 상선에서 하선(제주목사가 월남 세자를 죽였다고 분개).
  • 청산도 표착과 체류(1771.1.6.~1.12) : 1771년 1월 6일 청산도 표착, 8명 생존(이창성, 유창도, 김순기, 김재완, 양윤하, 김칠백, 장한철, 김서일), 사망한 일행 21명에 대해 제사, 섬의 폐단, 섬 여인과의 하룻밤.

우리가 청산도에 있을 때의 주인은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쌀과 돈을 마련해 주고, 또 갓 창의 짚신을 사서 내가 길 떠나는

것을 챙겨주었다. 늘 은혜를 느끼지만 갚을 길이 없다.

장한철

  • 귀환(1771.1.13~5.8) : 1771년 1월 13일 청산도 출발, 신지도, 고금도, 강진 남당포 이동, 제주도 상인들 및 제주 아전 김창현과 만남, 1771년 1월 16일 일행은 제주도로 출발, 장한철은 1월 19일 한양으로 향하며, 2월 3일 서울에 도착, 3월 3일 회시에서 떨어진후 5월 8일 제주 도착, 표류인들 무덤에 가 곡함, 객과의 문답.

태풍으로 노도근해에서 조난당하고, 유구 열도 호산도에 표착하여 왜구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안남 상고선에 의해 구조됐으나 상선에서 봉변당하고, 청산도 근해에서 또다시 조난 당해 사경을 헤매다 21명은 죽고 8명만이 살아남은 과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 책은 당시 표류 상황뿐만 아니라 그가 경과한 경로를 더듬어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담고 있어 해양지리서 역할 뿐 아니라 해양문학으로서의 가치 또한 높습니다.

장한철은 『표해록』을 쓴 후 4년만인 영조 51년(1775년) 정월 과거시험에 합격해 대정현감 등을 지낸 바 있고, 문집으로 『녹담집(鹿潭集)』을 남겼습니다. 1979년 정병욱 번역으로 범우사에서 한글판 『표해록』이 출간됐습니다

장한철 본관은 인동이며, 호는 녹담(鹿潭)입니다. 입도조(祖) 장일취의 7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선일(張善逸), 아버지는 장차방(張次房)입니다. 조실부모하여 중부(仲父, 둘째 아버지)인 쌍오당(雙梧堂) 장중방(張重房)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나 제주 삼천서당에 거접하여 박사업을 공부했습니다. 장한철은 향시에서 여러 번 수석 합격했는데, 과거 시험장에서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다고 전합니다. 1774년 어사 시취로 열린 제주 도과에 입격합니다. 전시직부의 특권을 얻었으며 1775년(영조 51년) 별시 문과에 급제(성적은 병과 27등)했습니다.

장한철은 조선왕조실록에 2번 나옵니다. 1775년 과거급제 1번, 1787년(정조11년) 5월 흡곡(강원동 통천) 현령 1번 입니다.

장한철 생가
장한철 생가

<등과이후>

내직으로 승정원 주서<정7품>, 성균관 학유<종9품>, 성균관 박사<정7품>, 성균관 전적 겸 양현고 주부<종6품>, 이조낭청<종6품>, 평시서 주부<종6품>, 공조참의<정3품>를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강원도 상운(양양) 찰방<종6품>, 강원도 흡곡(통천) 현령<종5품>, 1787년(정조 11년) 11월 제주 대정현감<종6품>을 지냈습니다. (출처: 김석익의 심재집) 1780년(정조 4년) 이조낭청<종6품>으로 근무하면서 정조 임금을 알현한 사실이 있습니다. 안동김씨 일파이자, 경화세족인 효효재김용겸은 성균 관을 방문해 반궁에 보관된 문적을 살펴본 일이 있었는데 성균관 박사 장한철이 김용겸을 수행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강원도 상운찰방으로 부임하여 금강산 유산기인 <금강은유록>을 저술했습니다. 1792년(정조 16년) 12월 평시주부<종6품>로 임명됩니다.

<표해록에 나타난 장한철의 면모>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중부 쌍오당 장중방으 보살핌 속에 성장했으며, 표류 당시 제주도에 아내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족을 서술할 때 효와 제사를 중시하는 선비의 면모를 보였으며, 다양한 독서를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주변을 설득하였습니다. 지도자로서 표류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재>

2011년 11월 25일, 제주도 애월읍 애월리 한담공원에 녹담 거사 장한철 선생 표해기적비(鹿潭居士 張漢喆 先生 漂海紀蹟碑)가 세워졌습니다. 이 기적비는 장한철 선생의 8대손인 고(故) 장시영 회장이 ‘표해록이 제주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후손들에게 도전의식을 길러주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세운 것이라고 하니 의미가 깊습니다. 2013년에는 한담과 곽지를 잇는 해안길을 '장한철 산책로'로 명명하고 애월읍에서 '표해록'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2021년에는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생가에 녹담 장한철 문학관이 개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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