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 금남 최부의 생애와 금남 표해록인 당토행정기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1. 18.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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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늘어지마을 최부 벽화
 

연재 1 금남 최부의 생애와 금남 표해록인 당토행정기에 대해 알아봅니다.

 

우선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에 대해 알아봅니다.

최부는 1454년 전라남도 나주 태생으로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으로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며 어머니는 영양 진씨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입니다. 유계린은 그의 사위이고 유희춘은 그의 외손자 입니다. 1470년(17세)에 해남 정씨인 훈련원 참군<정7품> 귀감의 딸과 결혼합니다.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申從濩)와 더불어 문명을 떨쳤고, 1480년(성종 11년) 벗들과 함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집에 모여 정지교부계를 만들었습니다.

1482년(성종 13년, 29세) 과거 을과 1등으로 급제하여 곧 교서관저작<정8품>·박사<정7품>, 군자감주부<종6품>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성종 16년) 전적<정6품>으로 대제학<정2품>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 그 속의 논(論)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 찬수자로 서거정, 이극돈, 이숙감, 김준, 이승녕, 표연말, 류인홍 등 입니다.

1486년(성종 17년) 김종직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습니다. 9월 수찬<정6품>이 되었고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487년(성종 18년) 1월에 홍문관 부교리<종5품>로 임명되고 점필재 등과 용산강을 유람했으며, 7월에 용양위사가 되었다가 곧 부사직<종5품> 이 되었으며, 9월에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갑니다.

1488년(성종 19년, 35세) 1월에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에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台州府臨海縣)에 도착하여 영파, 항주, 소주, 북경을 거쳐 6개월 후에 귀국하였습니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그는 상신(喪身)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기술했는데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입니다. 표해록은 15세기 후반 중국 동부 연안 지역의 자세하고 정밀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그리고 곧 고향으로 달려가 여막을 지키다가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삼년상을 지냈습니다.

1491년(성종 22년) 11월 복을 마치고 지평<정5품>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서경(署經)을 거부하였습니다.

1492년(성종 23년) 7월에 점필재(김종직)의 부고를 듣고, "무이정기"를 짓습니다.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습니다.

1493년(성종 24년) 봄에 세자 시강원 문학<정5품>이 되었으며, 4월에 홍문관교리<정5품>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말썽이 많아 결국 승문원교리<정5품>로서 낙착되고 말았습니다. 말썽의 골자는 친상을 당한 그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고향으로 달려가야 할 것인데도, 아무리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한가하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관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494년(성종 25년) 1월에 홍문관 교리<정5품>, 8월에 홍문관 부응교<종4품> 겸 예문과 응교<정4품>가 되었으며, 연산군 즉위후 '대행묘호소'를 지어 올렸습니다. 1495년(성종 26년) 성종실록 편수관<종4품> 이 되었습니다. 1496년(연산군 2년) 5월 호서지방에 가뭄이 들어 수차(水車) 제도를 관개(灌漑)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고, 8월에 홍문응교<정4품>이 되었으며, 9월에 '징청루기'를 지었습니다. 12월에 사간원 사간<종3품>이 되었습니다.

1497년(연산군 3년)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3정승인 신승선, 어세겸, 한치형 그리고 이조, 호조, 예조 3판서를 배격하였습니다. 이에 미움을 받아 상례<종3품>으로 좌천되고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498년(연산군 4년, 45세) 유자광 이극돈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은 능지처사, 최부는 점필재집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형을 받고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갔습니다.

최부 비석_늘어지 마을

1500년(연산군 6년) 단천 유배지에서 '무염설'을 지었습니다.

1504년(연산군 10년, 50세) 6월 문하인 동래로 유배를 간 박은이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며, 10월 김굉필이 죽었고 같은달 23일 처형되었습니다. 전날 김전, 홍언필과 위로주를 먹고 '공들은 잘 있으라' 하고 말했습니다. 24일 해남현 서안 목동의 언덕에 장사지냈습니다. 후에 외손인 유희춘이 비를 세웠으며, 현재 후손들이 1947년 영산강 늘어지 자락인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로 이장하여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최부는 사림파 정치인이자 관료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을 자처한 인물이나, 동시에 훈구파의 대표격인 사가정 서거정과도 깊이 교유하였습니다. 그의 문하에서는 읍취헌 박은, 용재 이행, 윤효정(尹孝貞) 등이 수학하였으며, 사위인 유계린(柳桂隣)과 나질(羅晊) 등도 학문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유계린의 아들이 유성춘(柳成春), 유희춘(柳希春)이며, 나질의 아들로 나사침(羅士忱)이 있으며 이들은 최부로부터 이어진 학문적 계보를 중시하였습니다. 이들 집안은 이후에도 최부의 문집인 《금남선생집》이나 《표해록》을 간행하는 등 그와 관련된 각종 기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최부 묘지_늘어지 마을

최부는 사후 2년이 지난 중종 반전(1506년) 이후 사후 복권되어, 승정원도승지<정3품>추증되었으며, 그를 추모하기 위해 2002년 7월에 중국 영해현 월계촌에 "최부 표류 사적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은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금속활자 및 목판본으로 여러차례 간행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부 간행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유통되었으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간행되었습니다. 또한 《통속표해록》이라는 번역서가 제작되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최부 묘지_늘어지 마을

현대의 역사가들 또한 그의 기록을 활용하는데, 이것은 그의 여행기가 15세기 중국 문화를 외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일한 기록이며 중국의 도시들과 지방 마다 드러나는 차이점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록에 드러난 입장과 태도는 15세기 조선 지식인의 성리학적 관점을 드러내며, 그는 중국 문화가 조선의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중국의 도시, 사람, 관습, 요리, 대운하를 통한 상업적 교류에 대한 그의 설명은 15세기에 중국인의 일상 생활과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의 차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금남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일본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근대 이전 중국 3대 여행서로 손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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