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5 한국 최초 마카오 탐험 세계인 홍어장수 문순득 표해록 5 정약전의 표해시말 자산어보

2024. 1. 22.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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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장수 문순득

연재 5 한국 최초 마카오 탐험 세계인 홍어장수 문순득 표해록 5 정약전의 표해시말 자산어보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은 《표해록》의 저자입니다. 신안군 일대에서 홍어 장사를 하던 평범한 어민으로, 1801년 12월 문순득은 작은아버지 문호겸, 마을 사람 이백근, 박무청, 이중원, 김옥문 등과 함께 대흑산도 남쪽에 있는 태사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유구국(오키나와)까지 표류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약 8개월간 머문 뒤 중국을 거쳐 주선으로 들어오려 배를 탔는데 또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필리핀)까지 표류합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머물다 다시 중국으로 가는 상선을 타고 광동성 오문(마카오)에 도착합니다. 광동 오문에서 3개월간 머물다가 남경과 북경을 거쳐 1805년 1월 고향에 돌아옵니다.

돈목 해수욕장

《표해록》은 목포해양대 국문학과 최덕원 교수가 우이도에 거주하는 주민 문채옥 씨의 집에서 발견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책입니다. 정약전의 《표해시말》에도 우이도 홍어상인 문순득 일행이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를 비롯해 필리핀과 마카오를 거쳐 1805년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3년 2개월 동안의 경험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현재 발견된 국내 표류기 가운데 이 지역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입니다. 1488년에 최부가 지은 《표해록》과 1770년에 장한철이 지은 《표해기》와 함께 우리나라 해양문학 작품으로 손꼽히는 저술입니다.

문순득 생가

당시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1805년부터 1816년까지 문순득을 인터뷰하고 그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하여 <표해시말>을 펴냈습니다. 이책에는 문순득의 표류일정과 함께 유구, 여송, 마카오의 풍속, 언어, 의복, 선박, 토산품, 기후 등이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문순득 표류 여정기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우리나라 개벽이래 해외의 오랑캐 나라를 최초로 보고 돌아왔다는 뜻에서 천초라는 자를 지어주었습니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표류담을 듣고 마카오에서 보고 온 화폐제도를 참고하여 "경세유표"에서 화폐제도의 개혁을 주장합니다.

1818년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우이도로 문순득을 찾아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선박에 대한 논문인 <운곡선설>을 썼습니다. 이강회는 정약전의 <표해시말>과 자신이 쓴 <운곡선설> <거설답객난> <제거설> 을 한데 묶어 <유암총서> 를 완성했습니다.

우이도(소흑산도) 진리마을

<표류경로>

  • 1801년 12월 : 우이도(소흑산도)에서 홍어(무럼)를 사기 위해 태사도(대흑산도)로 들어갔다. 문순득의 배에 작은아버지 문호겸 및 마을 사람 6명이 탑승.
  • 1802년 1월 18일 : 소흑산도를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진도 서쪽 조도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바람에 떠밀려 남쪽으로 표류.
  • 1802년 1월 19일 :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동남쪽 제주도를 널리하고 망망대해로 떠밀림.
  • 1802년 1월 29일 : 유구국 대도에 도착하여 물과 죽을 먹음(사흘 굶음)
  • 1802년 2월 2일 : 양관촌에 도착, 움막에서 생활.
  • 1802년 3월 29일 : 배로 도쿠노 섬을 지나고 다음날 양영부(오키노라부 섬)를 지나 요론 섬에 이르러 4일을 머무름.
  • 1802년 4월 4일 : 백촌(나하)에 이르니 통역을 하였고, 사람마다 매일 쌀 한되 다섯홉과 채소 여러 그릇, 하루걸러 돼지고기 제공됨. 여름옷을 내려주고 병이 들면 의원이 진찰하고 약을 줌.
  • 1802년 10월 7일 : 배를 띄움. 우리나라 사람 6명, 복건성 천진부 동안현 출신 조난자 32인. 유구인 60인을 태우고 백촌(나하)에서 400리 거리인 섬에 이르러 10일을 머무름.
  • 1802년 11월 1일 : 여송 서남마의 지방에 도착. 유구인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으러 육지로 갔다가 6명이 본국인에게 잡힘.
  • 1802년 11월 12일 : 남쪽으로 가서 5일간 머물고 물을 길어 빨래를 함. 일로미에 닿아 1803년까지 여송(필리핀)에서 복건인들에 의탁해서 생활함
  • 1803년 9월 9일 : 광둥성 오문(마카오)에 닿음. 여송인과 홍모 서양인 수만호가 살고 있음. 객사에서 불러 성대하게 대접함.
  • 1803년 12월 11일 : 배를 타고 3일만에 광동부에 닿음.
  • 1803년 12월 13일 : 총독부에 들렀다가 남해현에 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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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4년 3월 17일 : 배를 타고 11일동안 1,178리를 감. 호송관 장걸이 뒤를 따랐고 남웅부에 도착함.
  • 1804년 4월 5일 : 매령을 넘어 가마를 타고 125리를 감.
  • 1804년 4월 9일 : 배를 타고 4일을 가서 강서부에 닿음.
  • 1804년 4월 14일 : 배로 6일을 가서 남경에 도착함. 성둘레가 220리라 함.
  • 1804년 4월 20일 : 배로 50리를 가서 연자기를 구경함.
  • 1804년 4월 22일 : 배로 60리를 가서 야주부에서 묵음. 주교.
  • 1804년 4월 26일 : 삼보에서 가마를 타고 육로로 가서 황하강과 회수가 합류하는 곳일 듯한 사도를 건넘.
  • 1804년 4월 27일 : 수레를 타고 산동으로 들어감.
 

 

  • 1804년 5월 19일 : 황성에 도착.
  • 1804년 5월 22일 : 예부르 뵙고 통사를 따라나와 고려관에 머물다.
  • 1804년 9월 28일 : 우리나라 황력재자관(천문, 지리등 중국달력인 황력을 받으로 온 관리)이 북경에 도착함
  • 1804년 11월 4일 : 수레를 타고 출발함.
  • 1804년 11월 24일 : 책문(의주 맞은편) 지남.
  • 1804년 11월 27일 : 의주 도착.
  • 1804년 12월 16일 : 한양 도착.
  • 1804년 12월 30일 : 무안 도착.
  • 1805년 1월 8일 : 우이도 집에 도착.

순정 열녀비

정약전과 《자산어보》

진리에서 돈목으로 넘어가는 산길 초입 서당골이라 불리는 이곳에 정약전이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이도는 19세기 이 섬으로 유배를 온 정약전이 저술한 《자산어보》의 배경지가 됩니다. 정약전은 이곳에 귀양살이를 와서 이곳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손암 정약전(1760~1816)은 천주교도 탄압이 있었던 신유사옥(1801) 당시 이곳으로 유배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물고기, 해산물 등 총 227종의 어족연구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약전은 조선시대의 학자로서 인문학적 소양과 그 깊이가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32세에 문과에 급제, 병조 좌랑까지 올라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펴낸 이력도 있습니다.

우이도 진리항

그런데 선생은 서학에 뜻을 두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오직 천주교 전교에만 열중했습니다. 1801년 2월 9일, 정약전과 정약종 그리고 정약용 3형제는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보름 후, 천주교 전도회장이었던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정약전 · 정약용 형제는 옥에서 풀려나 유배되었습니다. 정약전은 전남 완도군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 땅으로 귀양을 갔던 것입니다.

그 무렵 발생한 사건이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입니다. 황사영이 청나라의 신부에게 도움을 청한, 1만 3천여 자에 달하는 밀서가 발각되어 손암을 포함한 다산 형제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해 11월 5일엔 함께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이리하여 정약전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오랜 시간을 거쳐 유배지 우이도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돈목 해수욕장

홀로 우이도라는 외딴 섬으로 유배 온 정약전은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잡고 해초며 조개, 소라와 전복들을 따던 섬사람들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으고, 생태를 조사해서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를 저술했습니다. 정약전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후 15년 동안 《논어난(論語難)》 《역간(易柬)》 《송정사의(松政私議)》 등 귀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회갑의 나이가 가까워졌을 무렵,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가족들과 고향 산천, 풀리지 않은 귀양살이를 뒤로한 채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로운 섬에서 쓸쓸하게 죽어 간 그의 주검은 온 섬사람들의 애도 속에 꽃상여 대신 배를 타고 고향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간다간다 고향간다

훠이훠이 고향간다

모진목숨 웬말인가

북망산천 내가간다

돌담길

문순득의 <표해록>은 중국·안남·유구·여송 등의 언어·풍속 등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해양문학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한 사람의 경험을 듣고 자기의 체험처럼 사실화(寫實化)한 실기(實記)라는 점에서 기록문학적(記錄文學的) 가치가 있습니다. 부록으로 있는 112개의 유구어와 여송어는 귀중한 언어학 연구 자료로 평가됩니다. 

문순득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우리나라 표해록중 최장기간인 3년 2개월간의 표류기를 남겼으며, 김대건 신부가 오문(광동 마카오)를 다녀가기 30여년 전에 조선 최초로 문순득이 마카오 시장거리를 거닐며 화폐의 유통 가치를 알려준 세계인이라 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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