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4 조선왕조실록 조선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자 최고의 정치가 이성계와 주변인물에 대해 알아봅니다. 02

2024. 2. 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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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04 조선왕조실록 조선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자 최고의 정치가 이성계와 주변인물에 대해 알아봅니다. 02

 

<위화도 회군>

우왕 14년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한 진군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명의 무리한 공물(말 오천필)요구와 갖가지 트집에 시달리던 고려는 우리 민족의 마지막 중원 공략을 시도합니다.

정벌 계획을 공표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왕은 전면전을 대비해 문화찬성사 우현보에게 개경을 지키게하고, 왕실의 가족들은 한양 산성으로 옮겨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3월 중순 평양으로 출발한 우왕은 다음달 1일 봉주에 이르러 그동안 최영 등 강경파들과 암암리에 계획했던 정벌의 뜻을 이성계에게 통보합니다.

우왕은 곧바로 평양으로 이동하여 전국의 군사를 집결시키고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도록 하는등 진군을 제촉합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여 평양에서 정벌군을 통할 감독하고, 실제 병력지휘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에게 맡깁니다. 최영(딸 영비, 우왕 장인)은 현지에서 직접 지휘하고자 했으나 우왕이 자기 주변에 남아 있기를 권하여 출진하지 않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됩니다. 군사는 좌우군 3만9천여명, 겸속이 1만2천여명으로 5만명이 넘었습니다. 말은 2만 2천여필 이었습니다.

4월 18일 평양을 떠난 정벌군은 5월 7일 압록강 위화도에 진을 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우기철로 비가 많이 오고 부교가 떠내려가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탈영이 심해 무리한 출정임을 입증합니다.

이성계는 4불가론(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것, 농사철이자 더운날에 군사를 움직이는것, 출병시 왜구의 침략이 우려되는 점, 장마철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사들의 질병이 염려되는 것)을 내세워 정벌의 무리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우왕과 최영은 내관인 김완을 파견하여 진군을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모든 장수들을 회유한 이성계는 5월 22일 마침내 역사적인 회군을 하게됩니다. 왕은 개경으로 환궁했으나 병력은 겨우 5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6월 1일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는 우군은 숭인문으로 좌군(조민수)은 선의문으로 진군하나 최영에게 막혀, 이성계가 왕궁 담을 헐고 들어가 최영을 잡아들여 귀양지에서 참수합니다. 이로서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고려의 멸망>

이성계의 양보로 조민수는 좌시중이 되었으나, 공민왕 후처인 대비인 정비와 창왕을 옹립하고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킵니다. 1338년 7월 이성계는 전제 개혁안을 완성하여 대사헌 조준으로 하여금 상소하게 하였으나, 좌시중 조민수, 이색, 이임, 권근, 우현보, 변안열등의 기득권층의 반대하자, 이성계는 조민수를 귀향보내고 좌시중에 이색을 천거합니다.

왕안덕 등의 주청으로 폐주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여주)으로 이송하고, 1389년 이색은 전제개혁안에 반대하여 사임하고 이임을 좌시중에 천거합니다.

대호군 김저, 부령 정득후가 우왕을 만나자 우왕이 곽충보에게 보검을 내려 이성계를 암살하도록 보검을 내립니다.

이성계는 곽충보의 고변으로 김저, 정득후 변안열(불굴가) 등을 처단하고, 공양왕을 즉위 시킵니다. 우왕과 창왕을 참수합니다.

 

조준(1346~1405, 충목왕 2년~태종 5년) : 우왕 즉위년인 1374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도 안렴사로 뽑혀, 정치를 잘하고 민생을 잘 돌보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다. 한때 은거하다가 위화도회군후 이성계와 인연을 맺음. 대사헌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관제, 신분제도, 국방 등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읍니다. 조선 개국후에는 정도전과 의견을 달리하여 대립함. 세자 책봉시 이방원을 지지함. '제 1차 왕자의 난' 으로 일등공신이 됨. 그의 아들 조대림이 태종의 둘째딸(정경공주)과 혼인하여 태종과 사돈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색(1328~1396, 충숙왕2년~태조 5년) :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대학자. 14살에 진사가 되었으며, 21세에 원나라의 국자감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1367년에 대사성이 되어 국학을 중흥시키고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힘썼다. 1377년에는 우왕의 스승이 되었고, 명나라와 철령위 문제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에 조민수와 창왕을 옹립한 그는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창왕 폐위후에는 장단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요동 정벌의 허와 실>

우왕과 최영은 왜 무리한 정벌을 감행해 왕조의 멸망을 자초했을까?

최영은 우왕의 장인으로서 친원파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신흥강국인 명과의 외교전에 실패하고 대항함으로써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감행하고, 결과적으로 위화도 회군이라는 구 왕조의 멸망과 신 왕조의 탄생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성계는 회군하는 도중 사냥을 하는등 우왕과 최영의 개경 도주시간을 벌어줌으로써 반역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사지않는 임기응변과 명분을 쌓기위한 신중함을 보입니다.

이성계는 변방 출신의 일개 장수이지만 뛰어난 무인이자 정치적 역량도 탁월했고, 매우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말년의 한>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에서 왕으로 즉위한 날이 1392년 7월 17일 이었는데 그의 나이가 이미 58세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향처인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1391년 사망) 소생으로 6남 2녀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2남 1녀가 있었습니다.

강씨는 황해도 곡산 사람으로 아버지 강윤성은 대부호로 이성계가 사냥하러 곡산 땅에 들렀다가 강씨의 집에서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혼인하게 되었는데, 강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장인인 강윤성이 이성계의 정치적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에 자연히 강씨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강씨는 정도전 남은과 결탁하여 이성계를 졸라 자신의 아들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무안대군 방번(1381~1398, 우왕7년~태조7년) : 태조의 일곱째, 신덕왕후 강씨의 큰아들로 세자에 내정되었으나, '명민하지 못하고 경솔하다' 하여 아우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제1차 왕자의 난'때 피살됨.

의안대군 방석(1382~1398) : 태조의 여덟째.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음. 정도전, 남은 등의 후원으로 세자 수업을 받던중 어머니 강씨의 죽음으로 위치가 흔들림. 방원이 한씨가 낳은 왕자들과 규합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파살함.

그러나 1396년(태조 5년)에 강씨는 방석이 왕위에 오르는것을 보지 못하고 위장병으로 세상을 뜹니다. 태조는 상심이 깊어 지금 정동 근처에 정릉으로 안장하고 능 옆에 흥천사를 짓고 중들이 거처하며 향불을 올리고 능을 지키게 합니다. 이러한 관습을 '조포사'라 합니다.

1398년 삼년상을 마치자 이성계는 상심이 깊었는지 병상에 눕게되고 10여일간 병세가 악화됩니다. 만일을 대비해 세자 및 왕자들이 근정전 밖에서 대기하게 됩니다.

정도전(1342~1398, 충혜왕 3년 ~태조 7년)

공민왕때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를 역임하다가 1383년에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이성계와 인연을 맺었다. 1392년 조준, 남은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의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는데, 개국 일등공신으로 정권을 병권을 한손에 움켜쥐고 요직에 앉았다. 1396년 요동 수복 계획을 세우고 사병 혁파와 진법훈련을 추진하던중 이방원의 기습으로 죽는다. 죄명은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데 가담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인데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이라 한다.

저서 :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불씨잡변>

 

정도전 일당이 사병혁파를 주장하고 전처 한씨 소생들을 모두 제거하여 어린 세자의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방원은 그들을 기습 공격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죽이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방우는 어머니 한씨를 소홀히 대하고 고려왕조를 멸망시켰다고 아버지를 못마땅하여 해주 수양산에 들어가 세상과 등을졌으므로 태조는 둘째 영안대군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2년후 넷째아들 회안대군 방간이 지중포부사 박포의 선동으로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2차 왕자의난' 또는 '박포의 난' 으로 또 다시 친형제간의 권력 쟁탈전이 일어나고, 세상사의 환멸을 느낀 이성계는 고향인 동북면으로 들어갑니다.

그후, 방과(공정왕-정종)에게 왕위를 넘겨받은 방원(태종)은 이성계의 환도를 추진하고자 이성계의 신임이 두터운 창녕 부원군 성석린(어미말, 새끼말)을 보내고, 이성계는 마지못해 대궐로 돌아왔으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태종 2년 1402년 11월 홀연히 대궐을 떠나 함흥에서 칩거합니다(함흥차사).

안변부사 조사의가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키지만 수습되고, 태종은 무학대사를 보내 아버지 이성계를 다시 대궐로 모십니다.

이성계는 젊었을때의 총기가 흐려져 말년에 계비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여 화를 부르고 말년을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보냅니다.

태조는 노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궁전안에 덕안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염불을 외는 일로 하루하루 살다 태종 8년 1408년 5월 24일 74세의 일기로 한을 삭이지 못한 채 눈을 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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