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8 조선왕조실록 공정왕 정종실록 편찬경위 정종의 생애와 치세 조영무 가의궁주 유씨 정안왕후 김씨 조박 불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20.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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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08 조선왕조실록 공정왕 정종실록 편찬경위 정종의 생애와 치세 조영무 가의궁주 유씨 정안왕후 김씨 조박 불노에 대해 알아봅니다.

후릉 근경_정종_정안왕후 김씨(경기도 판문군 령정리)

정종실록 편찬 경위

'정종실록'은 총 6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99년 1월부터 1400년 11월 11일까지 2년 동안에 있었던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원래 명칭은 '공정왕실록'이며, 숙종때 정종이란 묘호가 정해진 뒤로 비로소 '정종실록'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422년(세종4년) 태종이 죽자 이듬해 12월에 세종은 공정왕과 태종의 양대 실록을 수찬하라고 지시하고 사관들에게 사초를 제출케 합니다.

편찬작업은 1423년 3월부터 1426년 8월에 '공정왕실록'이 먼저 완성되었습니다. 편찬장소는 동부 연희방에 있는 덕흥사 내에 마련한 사국이었으며, 책임자는 변계량과 윤회였다.

격구

하지만 1430년 변계량이 사망하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가담하였다. 그 뒤 1438년 변계량이 지은 헌릉(태종,원경왕후 민씨) 비문 가운데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 대한 기술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자 세종은 이를 수정하도록 하여 1442년에 수정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공정왕실록'은 7년 동안의 작업 끝에 1431년 '태조실록' '태종실록'과 함께 충주 사고에 보관되었고(김문기 봉안), 1445년에 3부를 더 필사하여 신설한 전주 사고와 성주사고에 추가 보관되었습니다.충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 본의 삼조 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했던 것입니다.

정종 가계도

정종의 생애와 치세(1357~1419, 재위기간1398.9.5~1400.11.11, 2년 2개월)

정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1357년(공민왕 6년) 7월 1일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처음 이름은 방과였다가 후에 경으로 바꿨으며, 자는 광원입니다. 1377년 5월 20살 청년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밀직부사에 올랐습니다. 양광도(충청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서 격파했고 판밀직사사, 삼사우사등을 역임했습니다.

격구

정종은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지행이 단엄, 방정했습니다.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으나, 성빈 지씨, 숙의 기씨, 윤씨, 지씨, 이씨, 문씨, 가의궁주 유씨(불노) 등 10명의 부인에게서 17남 8녀를 두었습니다.

정종

조박(1356~1408, 공민왕 5년~태종 9년) :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문신, 이방원과 동서지간(왕비 민씨의 형부), 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성계 편에서서 조선이 개국시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올랐다. 정종때 대사헌으로 집현전 제조관이 되었으며, 정종의 숨은 자식 불노와 그의 어미 유씨를 궁에 데려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불노를 정종의 아들이라하여 조박이 죽은후 그의 자식들은 금고형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게된다.

불노(?~?) : 가의궁주 유씨의 아들로서 정종의 숨겨진 장남으로 알려졌다. 정종이 왕이 되기전에 낳은 아들로 유씨 손에 키워지다가 방과가 왕이된후 조박에 의해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에 유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아들 불노를 원자라 하였다. 하지만 세제 이방원이 불노를 죽이려 하자 그를 궁 밖으로 내쫒았다. 불노는 자신을 정종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다가 죽을 뻔하기도 하였으나, 태종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후 불노는 공주에 유배되었고, 승려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후릉 정안왕후 김씨 난간석 죽석 파손

가의궁주 유씨(?~?) : 정중의 후궁으로 불노의 어머니이다. 유씨는 처음 고려 우왕의 총신이었던 임견미의 사위 반복해에게 후실로 들어갔다가 반복해가 죽자, 방과에게 시집을 갔다. 유씨는 방과가 왕위에 오르자 불노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후궁이 되었다. 그녀는 이방원의 손위동서인 조박의 친척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박이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키워지고 있던 불노를 정종에게 데려온 것이다.

정안왕후 김씨(1355.1.9~1412.6.25) : 정안왕후 김씨는 경주김씨 김천서(공민왕 문하좌시중)의 딸이다. 1398년 9월에 영안대군(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비에 책봉되었다. 1400년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순덕왕 대비의 존호를 받았고, 1412년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그녀는 성정이 인자하고 후덕했으며, 정종이 왕위에 있을때 태종에게 선위할 것을 건의했다. 덕분에 정종은 권력다툼을 피해 천수를 누릴수 있었다.

후릉_정종_정안왕후 김씨(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조선이 건국되자 정종은 영안군으로 봉해졌고, 이듬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서 병권에 관여했습니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방석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전혀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이방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은 태조의 반발과 민심을 의식해 장남인 방우는 이미 죽었고, 둘째형 방과에게 세자의 자리를 잇도록 했고, 1398년 9월 5일에 태조가 물러나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왕좌에 앉았습니다. 1399년 개경으로 천도, 그해 8월 분경금지법(청탁금지법 시초)을 제정하고, 1400년 2울 4일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며, 4월 사병 혁파를 통한 병권 집중, 삼군부와 의정부 분리를 통한 군,정 분리체재 형성등을 통한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을 방원의 영향력하에서 이루었습니다.

격구

조영무(?~1414년, ?~태종14년) : 고려말과 조선 초의 문신.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의 고손자이며 서출로서 이성계의 사병이 됨으로써 출세의 길이 열렸다. 1392년 이방원의 명으로 조영규와 함께 정몽주를 살해한 뒤, 개국공신에 올랐다. '제1차 왕자의 난'에는 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제2차 왕자의 난'에도 공신에 봉해졌으나, 후에 태종이 사병혁파를 실시하자, 반발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곧 풀려난 후 우의정까지 오른다.

그 외에도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고, <조례상정도감>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했으나, 2년 2개월 재위시 정무보다는 격구등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했습니다.

1400년 11월 왕위에서 물러난 후 상왕으로 있으면서 인덕궁(개성 백룡산 기슭)에 머물며 격구나 사냥을 즐기고 온천을 다니거나 연회를 베푸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419년 9월 26일 인덕궁에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종의 능은 후릉(정종, 정안왕후 김씨)으로 경기도 판문군 령정리(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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