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6 조선왕조실록 시대의 진운을 예언한 놀라운 법력의 고승 무학대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8. 06:01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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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06 조선왕조실록 시대의 진운을 예언한 놀라운 법력의 고승 무학대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정도전과 무학 대사일 것입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국이 왜 건설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쳤고, 무학은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끌어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학(1327~1405)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승려가 되기전의 성은 박씨로 몽고전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법명은 자초이며, 18세에 수선사(송광사)로 출가하여 소지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중이 되었습니다. 그 뒤 용문산의 혜명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18세 부터 지리산에서 천문, 지리, 음양, 도참술등을 공부한 다음 21세에 비로소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학 지공 나옹

무학은 1346년(충목왕 2년) <능엄경>을 읽다가 "묘하고 밝은 참마음이 만법의 근본이 된다" 하는 구절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은 이후부터 수행에 힘썼으며, 1349년(충정왕 1년) 가을에 진주 길상사로 들어갔으며, 1352년(공민왕 1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는데, 이때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습니다.

무학은 1353년 홀연히 원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 스님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우연히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 스님을 만나 몇 차례 묻고 대답한 끝에 그의 놀라운 식견에 탄복한 나옹이 그를 인정하고 훗날 제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무학은 원나라에서 돌아온 뒤 나옹 스님을 찾았는데, 그때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나옹은 무학을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학이 천민 출신리라는 것과 선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학은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나옹이 죽자 전국의 명산을 돌아 다니며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무학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인 동시에, 새 왕조의 군왕이 될 이성계의 충실한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조선 중기 휴정이 지은 <석왕사기> 에 이성계가 무학을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변계량이 그의 탑비에서 "임신년의 만남이 있었으니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로 미루어 보아 1392년(임신년)에 만났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설화에는 조선이 창업되기 훨씬 전에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 도참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술에도 능통했습니다. 그는 불교 승려 이면서도 뛰어난 풍수도참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찾아온 이성계가 문(問)자를 짚어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아도 군(君)이라고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또한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자라고 하며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왕사로 받들었습니다.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 이라는 불교 최고의 책임자가 되어 "묘엄존자" 라는 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무학의 가르침으로는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은 하나라" "일시동인(一視同仁)" 의 정신을 강조하며, 죄수들을 풀어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무학의 혁명에 대한 염원은 부패 상황이 극에 달한 고려 말의 불교계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무학이 정도전을 비롯한 성리학자들과 손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교적인 입장보다는 개혁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한양

 

당시 무학이 인왕산을 궁궐의 뒷산인 진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도전이 서쪽에 있는 산을 진산으로 삼는 법은 없다며, 북악산을 진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경복궁 이름도 정도전 뜻대로 지은 것을 보면, 무학이 정도전에 밀렸던 것 같으며 다만 대립하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입력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할때 왕십리라는 일화와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힘씁니다. 무학은 자신의 소임이 끝나자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신라 말 도선은 왕건의 고려 창업에 크게 기여하고 난 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 인물이지만, 무학은 이성계를 군왕으로 이끌어서 조선을 세우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면서도, 그 후 은둔하여 평생 불도를 닦는데 정진한 고승이었습니다.

양주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이색은 무학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스님의 성품은 본질을 숭상하고 꾸미는 것을 싫어했다. 음식을 매우 적게 먹었고 남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늘 말하기를 "8만가지 행실중에서 아이들 하는 짓이 제일이다" 라고 했는데, 무릇 스님이 베푸는 일에 아이와 같지 않은것이 없었다. 또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과 사물을 아끼는 정성은 모두 스님의 지극한 마음에서 나왔는데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려 하지 않는 것은 스님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았던 태종도 무학의 행동과 인품을 높이 평가해 회암사에 무학의 탑비를 세우게 하였고, 당대 문장가인 변계량을 시켜 무학을 찬양하는 비명을 짓게 하였습니다. 훗날 남산 위에 국사당이 세워져 무당들이 그곳을 떠받들고 민중들이 찾아와서 복을 빌었는데, 이곳에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셨다고 합니다.

무학이 남긴 저서로는 <인공음> <무학대사어록> 이 있으나 전하지 않고, <무학비결> 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 그의 저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 <불교종파지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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