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9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편찬경위 태종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21.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728x90
반응형

연재 009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편찬경위 태종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태종 어진

태종실록 편찬 경위

'태종실록'은 총 36권 1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01년부터 1418년 8월까지 17년 8개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명은 '태종공정대왕실록'이로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당시 편찬했던 것 중에 남아있는 것은 전주 사고본입니다.

'태종실록'은 1422년 태종이 죽자 그 이듬해 12월 변경량과 윤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정왕실록'과 함께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편찬작업은 1422년 3월에 시작하여 1431년 완성될 때까지 9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실록편찬은 변계량, 윤회, 신장 등의 책임 아래 이뤄졌는데, 동부연희방의 덕흥사가 작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변계량이 병약하여 춘추관으로 출퇴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종실록'은 1426년 '공정왕실록'이 편찬된 뒤에도 5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습니다. 편찬 도중 1430년 4월 변계량이 죽자, 편찬 장소를 의정부로 옮기고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윤회, 신장 등과 함께 편찬 책임을 맡아 1년 뒤인 1431년 3월에 완성합니다.

1431년 세종 13년 3월 예문관 검열 김문기가 태종실록 36권을 춘추관에서 삼가 왕지를 받들어 찬하여 올리고, 1431년 세종 13년 4월 25일 예문 검열 김문기를 보내 태조, 공정(정종-숙종 때 비로소 묘호가 정해짐), 태종실록을 충주 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뒤 변계량이 지은 헌릉(태종의 능)의 비문 가운데 양대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있자, 세종은 비문과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태조실록' '공정왕실록'등도 개수하도록 지시합니다. 실록 개수작업은 1442년에 신개의 감수 아래 권제, 안지 등의 춘추관 관료와 집현전 학사 남수문 등이 주관합니다. '태종실록'은 1401년 1월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태종이 즉위한 1400년 11월터 그해 말까지 '공정왕실록'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뒤 이것만으로는 영구 보존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자 1445년까지 위의 삼조실록(三朝實錄) 3부를 더 필사해 춘추관과 충주 및 신설한 전주·성주 사고에 각각 1부씩 봉안하였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정족산본의 태조·정종·태종의 삼조실록은 이때 필사해 전주사고에 봉안한 것입니다.

태종 가계도

태종의 생애와 치세(1367.5.16~1422.5.10, 재위기간 1400.11~1418.8, 17년 10개월)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방원이고 자는 유덕입니다.

그는 고려왕조 때부터 정치에 뜻이 있어 아버지 이성계를 보좌했고, 1392년에 정몽주와 공양왕이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기회 삼아 정도전, 남은, 조준 등 측근들을 모두 쫒아내자, 수하의 조영규 등을 시켜 정몽주를 죽입니다. 이 덕분에 이성계는 권력을 회복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였으며, 방원은 개국공신 1등에 올라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릅니다.

조영규(?~1395, ?~태조4년)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이성계의 사병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천거로 벼슬길에 들어섬. 우왕 11년 함주 일대 왜구를 토벌하여 전공을 세우고, 1392년 이방원과 모의해 이성계 병원안을 온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임. 같은 해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2등. 신창조씨의 시조.

출처 입력

그러나 이성계가 정도전, 남은 등의 공신들에 의지하여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그는 1398년에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를 몰아내고, 방석을 살해한후 자신의 형 방과(정종)를 왕위에 앉힙니다. 그후 1400년에 방간의 난을 진압하여 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11월에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철저한 배불숭유 정책(불교 존폐위기-종단 7종, 사찰242개, 몰수노비 8만구, 몰수전답 6만결)과 육조 기능을 강화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1402년 신문고를 설치했으며, 1403년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고, 하륜 등으로 하여금 <동국사략> <고려사>를 편찬케 하였으며, 저폐를 만들어 경제유통을 원활히 하고, 호폐법(16세이상 남자, 10~20% 효과)을 신설하는등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집니다. 특히 벽골제를 대규모로 보수하는등 수리공사에 전념합니다.(태종우, 태종 기일 매년 음력 5월 10일 비가온다는 전설)

17년 10개월 동안 재위하면서 네차례에 걸친 선위파동을 일으켜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등을 죽이고 세자 양녕을 폐위하기도 하였습니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1410년, ?~태종10년) :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첫째, 둘째동생. '제1차 왕자의 난' 및 태종 즉위에 큰 공을 세워 정사, 좌명공신. 세자 양녕을 키워 권세를 찌름. 태종은 이숙번과 하륜을 이용하여 죄인으로 몰아 유배보냄. 셋째 무휼 넷째 무회도 1416년 두 형의 죽음을 호소하다 사사됨.

양녕대군(1394~1462, 태조3년~세조8년, 69세 졸) : 이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 1407년 14살에 김한로의 딸과 혼인.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 어리 자살함-서녀 출생(정3품 현주), 며느리 범함, 아들 자결.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이후 안평대군 및 단종을 죽이도록 간청함.

효령대군(1396~1486, 태조5년~성종17년, 91세 졸) : 이보.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 아들. 1418년(태종 19년)에 양녕이 폐위되자, 태도를 삼가고 글읽기에 열중하였으나,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절에 들어가 불도에 전념했다. 부인은 해주 정씨 정역의 딸로 6남 2녀를 낳았다. 그 외에 서자녀 1남 1녀가 있다.

출처 입력

헌릉_태종_원경왕후 민씨

1418년 8월에는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세자 도(세종)에게 전격적으로 왕위를 넘깁니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병권을 틀어쥔 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시 영의정이었던 세종의 장인 심온의 일족을 몰락시킵니다. 또 왜구가 일어나 조선 연안을 위협하자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력을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헌릉 신도비

그는 상왕으로 4년간 머물다가 1422년 5월 10일에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묘호는 '태종공정성덕신공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입니다. 능은 광주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헌릉입니다. 태종은 1명의 정비와 9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정비에게서 4남 4녀, 후궁들에게서 8남 13녀를 얻었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