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07 조선왕조실록 새 시대를 꿈꾸며 조선을 설계한 무소불능의 비운의 천재 정도전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9.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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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07 조선왕조실록 새 시대를 꿈꾸며 조선을 설계한 무소불능의 비운의 천재 정도전에 대해 알아봅니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정도전(1342~1398, 충혜왕 3년~태조 7년)은 조선 건국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탄생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를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조선 개국후 불과 7년 만인 1398년 8월 이방원에 의해 남은등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 으로 살해당합니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자 정도전의 인물평을 보면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세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정도전은 죽은 후 500년 동안 두 왕을 섬긴 변절자, 왕실의 종친을 해치려는 역모를 꾸민 인물로 평가되어 무덤조차 남지 않은 비운의 개국공신입니다. 삼봉(정도전) 밑에는 정자도 짓지 않는다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경복궁

정도전은 1342년 형부상서(법무부 장관)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이색의 밑에서 수학하였는데,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그와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입니다. 이색이 정도전을 평하기를 "정도전은 항상 할 일을 다하지 못함이 없고, 어떤 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하고 칭찬하였습니다.

20세인 1362년(공민왕 1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정7품>, 왕에게 <대학>을 강의하는 태학사 등의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합니다. 그러나 정도전의 어머니와 부인의 집안에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문제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1375년(우왕 2년) 친명을 주장하다가 회진현(나주)으로 유배 당합니다. 그후 한양으로 올라와 인왕산 밑에 삼봉재란 정자를 짓고, 유배 생활을 바탕으로 완성된 자신의 생각들을 제자들에게 전파합니다. 암중모색의 세월 속에서 1384년(우왕 10년) 정몽주가 명나라 사절로 가게 되자 정도전을 추전하여 같이 명으로 가게 됩니다. 그후 성균관 좨주<정3품>로 있다가, 스스로 외직을 청해 남양 부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경험하고 선정을 베풉니다. 1388년(우왕 14년) 이성계에 의해 성균관 대사성<정3품>으로 중앙 관계에 복귀합니다.

위화도 회군 후 폐가진입의 논리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합니다.

친원파의 구세력에 의해 탄핵되고 공신녹권을 회수당했으며 봉화현으로 유배됩니다. 이방원이 구세력의 맹주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정국의 반전을 꾀하고, 정도전도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에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사지에서 벗어났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으로 이방원에게 죽는 역사적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정도전은 <맹자> 의 민본주의 사상과 역성혁명론을 주창합니다. 그의 사상들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등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도전의 저술 및 역할>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태조의 즉위(58세)화 함께 조선이 건국되고, 정도전은 한양 도읍 설계는 물론 왕명에 따라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와 시장이 들어설 자리를 결정하고, 경복궁 등 각종 궁궐의 설계까지도 책임집니다.

경복궁, 창덕궁, 근정전, 사정전 등 각 전각의 이름을 지은것도 정도전입니다.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국무총리)와 의흥삼군부사(국방장관)를 맡아 조선의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를 정비해 나감으로써 조선 권력의 중심에 오릅니다. 조준 등과 함께 <고려사> 37권을 편찬하고, 태조 3년엔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조선 왕조가 갖추어야 할 정부 형태와 군사제도, 조세제도는 물론 관혼상제의 원칙까지 종합적으로 밝혔습니다.

또한 <감사요약>을 만들어 지방 행정의 근간을 마련하였고, <경제문감>을 지어 중앙 관료들의 임무와 경비 및 감사 제도에 이르기까지 행정 지침서를 만들었습니다.

한성도

그 외에도 당시 명망가들의 필적과 시문을 채집하여 문든 <국초군영진적>, 배불 정책의 정당성을 역설한 <불씨잡변>도 그의 작품입니다.

정도전은 군사전문가로서 중국 역대 병법을 참고로 <오행 진출기도> <강무도>등의 병서를 지었으며, 그가 직접 훈련에 사용했던 <진법>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병법서 입니다.

또한 <문덕곡> <수보록> <몽금척>등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악곡을 지었습니다.

태조는 정도전을 봉화백으로 임명해 종친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고 자신을 송헌거사라고 칭하며 친구처럼 대할 정도 였습니다.

조선 경국전
<허무한 최후>

정도전은 타고난 성품이 날까롭고 도전적이었으며 타협적이지 못해 스승인 이색과 반목하고, 구세력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항상 선두에 나서 주위에 적이 많았습니다.

1396년(태조 5년)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에서 보내온 표문중에 예의에 벗어나는 문장이 있다면서 정도전을 지목하고 그를 명으로 끌고 오라고 요구했으며, 명으로 온 수십명의 사신을 구속하거나 유배시키는등 횡포를 부립니다.

명과의 갈등이 악화되자, 정도전은 자신이 만든 <오진도>를 기본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요동 정벌을 주창합니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관군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여 개국 공신들의 반발을 삽니다.

태조는 58세에 왕위에 올라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신덕왕후 강씨는 정도전 남은과 결탁하여 이성계를 졸라 자신의 아들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재상중심주의'를 주장하였으나 방원은 장차 왕위를 꿈꾸며 강력한 '왕권주의' 를 지향하였음이 양자간의 대립의 원인이 되었고,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에 의한 사병혁파는 종친들의 반발을 사게됩니다.

결국 정도전은 태조 7년 진법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절제사와 장군들에게 곤장을 치고 무려 292명을 탄핵하는 대사건이 발생합니다. 군사적 기반을 뺏기지 않으려는 종친들의 반발로 대탄핵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17일 후 이방원에 의해 살해됩니다. 남은, 심효생, 장지화, 정도전, 방번, 방석 피살

<태종실록>에는 대신들이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여 죄를 용서해 주자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듣지 않습니다. 정도전의 복권을 주장했던 대신들은 훗날 모두 탄핵당합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역적의 상징으로 남다가,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궁의 설계자였던 공로를 인정하여 문헌공으로 복권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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