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0 조선왕조실록 태종의 치적 및 원경왕후 민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22.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728x90
반응형

 

연재 010 조선왕조실록 태종의 치적 및 원경왕후 민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태종(1367.5.16~1422.5.10, 재위기간 1400.11~1418.8, 17년 10개월)은 두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와 개국공신을 죽이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자행하였으나, 등극후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관료제도의 확립, 왕도정치의 추진 등 정치 군사적인면에서 중앙 집권화를 통해 아들 세종에게 태평성대(?)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신문고의 설치>

태종 1년(1401) 8월 대궐 문 위에 신문고(북)을 매달아 놓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로 하여금 북을 두드려 왕에게 직접 호소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처음에는 등문고라 하였으나 뒤에 신문고로 고쳤습니다.

신문고는 국왕 직속 기관인 의금부에서 주관하였으며,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는 주장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여 사헌부에 고소하고 여기서도 해결이 안될시 신문고를 두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아의 구실아치가 상관을 고발하거나, 백성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도리어 벌을 주고 오직 나라에 관련된거나 불법으로 살인 및 자신에 관계된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에 한해서 소원을 받아 들였습니다.

<한성으로의 재천도>

태종이 즉위한후 개성의 수창궁에서 불이 나 여러 건물이 타는 한편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하여 태종 5년(1405) 1월 15일 다시 한양으로 천도합니다. 태조때 건립한 경복궁이 아닌 별궁인 창덕궁을 지어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별와요'를 두고 기와를 구워 한성의 가옥 절반가량이 기와 지붕으로 바뀝니다.

또한 큰 배수로를 만들어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등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 물을 모으는 청계천 공사를 벌였으며, 이 공사는 태종 11년(1411) 말에 개천 도감을 두어 삼남 지방의 군인을 징집하여 1개월 만에 준공하였습니다.

청계천

<관제개혁>

태종은 1401년, 1405년 두차례에 걸처 관제 개혁을 단행하여 의정부와 6조 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즉 합의기관 이었던 의정부의 권한을 줄이고, 6조 직계 제도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합니다.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하여 결재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비서 기관인 승정원, 간쟁 기관인 사간원과 국왕 직속 최고 사법기관인 의금부를 설치하였습니다.

한편, 왕실의 대우를 제한하여 외척을 봉군하는 제도를 태조 9년(1409)에 폐지하고, 1414년에는 종친으로서 봉군되지 않은 자와 외척에 대한 사무를 관리하는 '돈령부'를 두어 왕실의 기강확립에 힘썼습니다.

또한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국방을 강화하였으며,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습니다.

<대외정책>

조선은 건국후 친명정책을 쓰는 한편 여진족을 회유하여 요동 수복운동을 전개합니다. 태종은 명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기위해 요동 수복운동을 보류하자, 명은 조선 국왕을 승인하고 고명(승인장)고 인신(도장)을 조선에 보내옴으로써 외교관계가 정상화 됩니다.

태종 6년(1406) 두만강 유역의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과 국경무역을 허락합니다. 태종 16년(1416)에는 현재의 중강진 부근에 예언군을 개척하여 강계, 갑산 일대를 점령합니다.

태종 가계도

<호패법 실시>

태종 2년(1402)에 호패란 신분증을 만들어 남자 16세 이상은 귀족에서 노비까지 누구나 호패를 차게 하였다. 군역과 인적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농민이 떠도는 것을 막기위함으로 5가 작통법과 함께 농촌 통치책으로 이용되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상아, 뼈, 나무 등의 재료로 성명, 나이, 출생해 간지, 신분, 저주 등을 세기고 관아의 낙인을 찍었으며,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감사가 맡아 보았으나 실효성은 별로였습니다.

<호포의 폐지와 저화의 발행>

호포는 호를 단위로 무명이나 모시를 징수하던 조세제도로 고려 충렬왕 때부터 시행하였으며, 태조때 대호는 무명 2필, 중호는 1필, 소호는 반필을 납부토록 하였다가 태종때 공물과 함께 이중으로 징수하던 호포를 폐지하였다. 태종 1년(1401) '사섬서'를 설치하고 닥나무 껍질로 저화를 발행하였으며, 가치는 무명 1필에 20장, 쌀 1되에 1장이었습니다.

<억불숭유 정책과 미신 타파>

태조은 도첩제를 실시하고 사찰의 설립을 억제하였다. 이는 함부로 승려가 되어 국가 인적 자원 낭비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태종은 불교를 억누르기 위해 불교를 5교 양종으로 정리하고 사찰은 242개만 남겨두고, 절에서 소유하던 토지 5,6만 결과 노비 8만여명을 몰수하였다. 한편 각종 유교 경전을 간행하는등 강력한 숭유정책을 폈습니다. 또한 민간에 널리 퍼진 풍수 도참사상에 의거 수도를 한양에 정하고, 1417년에는 비기를 엄금하였습니다.

<문화적 업적>

태종은 활자와 인쇄술에 있어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습니다. 태종 3년(1403) 주자소를 설치하여 동활자인 계미자 10만자를 만들어, <송조포전총류> <심칠사찬고금통요>를 간행하였습니다. 이는 독일 쿠텐베르크보다 50여년이 앞선 것입니다. 태종 8년(1408) 5월 태조가 승하하자 하륜, 유관, 정이오, 변계량등에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1413년 3월에 완성됩니다. 수정 보완을 거쳐 1431년 세종 13년 4월 25일 예문검열 김문기가 태조, 공정, 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헌릉_태종_원경왕후 민씨

원경왕후 민씨(1365.7.11~1420.7.10) : 태종 이방원의 스승인 여흥민씨 민제의 둘째딸로 태종보다 2살 많았다. 민씨는 1365년 개성 철동에서 태어나 18세인 1382년(우왕 8년) 이방원과 결혼하였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때 자신의 동생들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세력을 제거하는데 기여했다. 방원은 1400년 2월 '방간의 난' 을 제압하자 민씨는 정빈에 봉해졌고, 그해 11월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태종의 축첩에 따라 자주 다투고 외척세력을 경계하는 태종에 의해 동생 4명을 죽이는 결과를 맞이한다. 1420년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양녕, 효령, 충령, 성녕 4남과 정순, 경정, 경안<부마 길창군 권규-아버지 권근, 아들 권총, 권담. 권담 딸 권영금-김문기 아들 김현석의 후처, 계유정난후 권람에게 정속> , 정선 등 4녀를 두었다.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