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1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편찬경위 세종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2. 23.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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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10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편찬경위 세종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세종실록 편찬 경위

'세종실록'은 총 163권 15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명은 '세종장헌대왕실록'입니다.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 31년 6개월 동안의 역사를 편년체와 세부기록인 지(志)로 편찬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편찬작업은 1452년 2월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편찬 작업의 감수는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등이 맡았고, 허조, 정창손, 박중림, 이계전, 신석조 등 6명이 재위 기간을 여섯으로 나눠 실질적인 편찬 업무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종서, 황보인 등이 계유정란으로 피살되자 정인지 혼자서 감수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박중림은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어 최항이 그 일을 대신 맡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실록'은 단종 원년인 1452년 정월에 거의 마무리되었지만, 감수 작업은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어 2년 1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습니다.

'세종실록'은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처음에는 한벌만 만들어 춘추관에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년) 11월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에 이미 편찬되었던 '문종실록'과 함께 주자로 인쇄를 시작해 6년후인 1472년 3부를 더 찍어 냅니다.

이때 간행된 '세종실록'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봉안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외었으며. 이 사고본을 바탕으로 1603년부터 1606년에 걸쳐 '태종실록' 부터 '명종실록'까지 각각 3부를 다시 간행하였습니다. 이당시 최종 교정본을 포함하여 전주 사고본과 함께 총 5부를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등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춘추관(창덕궁) 실록이 소실되고 일부 실록이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하여 인조대 이후 실록은 정족산(강화도), 태백산(봉화), 적상산(무주), 오대산(평창) 사고에 보관되었습니다.

그귀 일본 감점기인 1929년부터 1939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영인본을 만들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영인본을 보급하였습니다.

'세종실록'은 1권부터 127권까지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128권부터 163권까지는 지(志)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지(志)는 일종의 주제별, 사건별 정리 방식으로 오례(128~135), 악보(136~147), 지리지(148~155), 칠정산(156~163)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대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 제도, 예, 악, 및 기타 문화 방면에서 획기적인 사업이 이루어진 시기로, 세종대는 조선 사회가 전체적으로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어 정착기에 진입한 시기였습니다.

'세종실록'은 이렇게 조선이 발전되는 과정을 총체적이고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사회의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자료가 되었습니다.

태종 가계도

세종의 생애와 치세(1397.4.10~1450.2.17 재위기간 1418.8.~1450.2. 31년 6개월)

세종은 태종의 3남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으로, 한양의 잠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입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성격이 곧고 인정이 많았으며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태종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반대로 세자였던 양녕은(제) 학문을 싫어하고 사냥과 주색에 몰두했기 때문에 늘 부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태종은 1418년 6월에 세자 제를 폐하고, 도(세종)을 세자로 세워 8월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재위 초기 4년 동안 태종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 세종은 운신의 폭이 좁아 조정 대신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습니다.

세종 가계도

소헌왕후 심씨(1395.9.~1446.3.24) : 아버지는 영의정 청송 심씨 심온,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양주에서 태어났으며 14세인 1408년 두살 아래인 충령군 도와 혼인.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함. 1418년 6월 경빈으로 봉해지고 12월에 왕비(공비)로 책봉. 강상인의 옥으로 아버지 심온이 죽자 박은 조말생등이 폐비를 주청하였으나 세종이 극구 변호함. 그녀의 어머니 안씨까지 천비로 전락. 52세 졸. 영릉에 세종과 합장. 아들 8형제(문종,세조,안평 등) 와 두딸(정소,정의)을 둠. 조부 심덕부 문하좌시중, 좌정승, 부 심온 영의정, 아들 심회(소헌왕후 동생) 영의정 - 조선 3대 최초 수상, 심온(5남) 동생 심종(6남, 작은아버지)은 태조 경선공주 부마. 동지총제 심정(7남), 외삼촌 안수산.

강상인의 옥(1418년, 세종1년) : 태종은 심온에게 국구의 예로서 영의정에 제수하고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는데, 심온 환송행렬이 장안을 메웠다는 소리를 듣고, 아우인 도총제 심정 및 병조참판 강상인이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 알리지 않는등 태종을 분노케 해, 우부대언 원숙,병조좌랑 안헌오, 좌의정 박은(어효첨 장인, 47세 좌의정)등의 주청으로 병조판서 박습(참형), 이조참판 이관(참형), 병조참판 강상인(거열형), 병조참의 이각(유배), 병조좌랑 채지지(유배), 동지총제 심정(참형), 영의정 심온(44세, 자진-유정현 말을 듣고 이해)을 처단한 사건.

출처 입력

태종은 대신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의 최대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던 세종의 장인인 심온 형제를 죽이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박은등은 세종의 왕비 심씨의 폐비론을 부각하여 세종을 난처하게 합니다. 즉위 초부터 혹독한 시험 무대를 거친 세종은 태종이 죽은 1422년부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정치, 사회, 문화, 과학 등 전 분야에 걸친 일대 혁신을 시도하여 전례 없는 황금시대를 구가합니다.

맹사성

 

황희, 유관, 맹사성 등과 같은 노숙한 정치인들을 재상으로 포진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뤘고, 군사 문제에 밝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앞세워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토지정책과 조세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농업을 혁신하고, 국가 재정을 늘렸습니다.

또한 세종 2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등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교육, 서적편찬등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였으며, 측우기를 비롯한 해시계 '앙부일구' , 물시계 '자격루' , 간의대 등으로 과학혁명을 일으켰으며, 스스로 언어학에 몰두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기적 같은 일들을 완수했습니다.

세종 소헌왕후_영릉01

세종은 학문에 대한 깊은 탐구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판단력,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추진하는 추진력, 나아가 백성과 신하를 생각하는 인간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지도자 였습니다.

세종 소헌왕후_영릉02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은 재위 31년 6개월 만인 1450년 2월 17일에 여덟째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시호를 장헌(莊憲)이라 하였고, 조선에서는 묘호를 세종으로 올렸습니다. 여기에 여러 시호와 존호가 추가되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입니다. 능은 원래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 산에 마련하였다가, 예종 원년인 1469년 3월 6일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성산으로 옮겼습니다. 이승소가 묘지를 짓고, 윤회가 행장을 지었으며, 정인지가 신도비의 글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정인지의 글은 이장할때 원래 능이 있던 곳에 묻어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증호는 영릉(英陵)입니다. 세종은 정비 1명과 5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정비인 소헌왕후에게서 적자 8명과 적녀 2명, 영빈 강씨 등 5명의 후궁들에게서 서자 10명, 서녀 2명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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