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8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편찬경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9.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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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18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편찬경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문종 현덕왕후 권씨 현릉01

문종실록 편찬 경위

'문종실록'은 총 13권으로 1450년 3월부터 1452년 5월까지 문종 재위기간 2년 3개월간에 이루어진 각 분야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종실록'은 1454년 3월에 <세종실록>이 완성되자 곧바로 편찬 작업에 들어가서 1455년 11월에 완성되었습니다. 감수관은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이어 수양대군이었지만 수양이 즉위하자 정인지가 맡았습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조는 실록각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도승지 박원형과 좌부승지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편찬 관계자들에게 술, 감귤, 향혼 등을 하사하였습니다.

문종 현릉

현존하는 '문종실록'은 문종 1451년(문종 1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해당하는 두 달 분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대해 1600년(선조 33년) 8월 예문관 대교로 있던 권태일이 묘향산에 가서 실록을 살피다가 처음으로 '문종실록'의 착오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성주, 충주사고가 불타고 오직 전수사고의 실록만이 남아 이것을 묘향산에 옮겼는데, 이 전주사고본에는 '문종실록' 11건의 표지와 내용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즉 표지에는 11권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9권이어서 실제로는 11권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권태일은 인쇄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할 때 착오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것은 전주사고 외의 다른 사고 중의 한 곳에 표지는 9권이지만 내용은 11권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어, 문종 시대인 1451년 12월과 1452년 1월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증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문종의 생애와 치세(1414.10.3~1452.5.14 재위기간 1450.2.~1452.5. 2년 4개월)

문종은 세종의 장남이며 소헌왕후 심씨의 소생으로, 한양의 사저에서 1414년(태종 14년)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향 자는 휘지입니다.

그는 8세 되던 1421년(세종3년) 10월 27일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37년부터 세종을 대신하여 서무를 결재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1442년부터는 첨사원을 설치하여 1445년부터 본격적으로 섭정을 하다가 1450년 2월 17일에 세종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자 곧바로(22일, 37세) 즉위했습니다.

그는 세종대에 서무 결재와 섭정을 경험하여 치세에 무리가 없었고, 학문을 사랑하여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했고, <진법구편>을 직접 저술하였습니다. 세자로 있을때부터 진법을 편찬하는등 군정에 밝아 화차를 직접 설계해 서울에 50량, 변경에 80량을 두었으며 전국적으로 500여대를 지방에 배치하였습니다.

문종은 유학뿐 아니라 천문과 산술에도 정통했고, 예, 초, 해서 등 서예에도 능했습니다. 그러나 병약한 몸으로 지나치게 정무에 매달린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목숨을 재촉했습니다. 신하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해 따뜻한 방에 거처하며 치료를 청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무리하게 삼년상을 치러냈습니다. 삼년상 후에는 신하들을 일일이 윤대하며 정사에 지나친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병이 났고 삼년상을 끝낸지 3개월 만인 1452년 5월 14일에 경복궁의 천추전에서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서 시호를 공순이라 하였고, 조선에서는 묘호를 '문종'으로 올렸습니다. 여기에 여러 시호와 존호가 추가되어 정식 명칭은 '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입니다. 증은 양주 건원릉 동쪽 산(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현릉이라 했습니다.

문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따로 정비를 두지 않았고, 죽은 세자빈 권씨를 왕후로 추봉했습니다. 정비 1명과 후궁 2명을 뒀으며 정비 권씨에게서 1남 1녀(단종, 경혜공주) 후궁(사칙, 수칙 양씨, 종6품, 궁녀출신 문종과 동갑)에게서 1녀(경숙옹주)를 얻었습니다.

현덕왕후 권씨릉 난간석과 상석

현덕왕후 권씨(1418.3.12~1441.7.24) : 아버지는 안동 권씨 화산부원군 권전(1371~1441)이며 어머니는 최아지(문종 장모, 1456년 단종복위운동시 아들인 권자신<현덕왕후 아우>과 처형됨)로 홍주 합덕현에서 태어났으며, 1431년(세종 13년) 14세의 나이에 세자 향(문종)의 후궁으로 뽑혀 동궁에 입궐 승휘(종4품)에 책봉. 이후에 양원(종3품)으로 승진. 당시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 순빈 봉씨 폐출(1436년), 세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됨. 단종을 낳은지 이틀만인 1441년 동궁의 자선당에서 2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함. 문종때 왕후로 추봉됨, 능호는 현릉이다. 1남(단종) 1녀(경혜공주, 부마 영양위 정종)

정종(鄭悰, 1437년 ~ 1461년)조선의 문신이며, 문종부마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참판 정충경(忠敬)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년)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봉하여졌다. 영조34년에 영양부원군(寧陽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 단종 초기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가, 1455년(단종 3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금성대군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456년(세조 2년)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 통진을 거쳐 전라도 광주에 안치되었고, 1461년에 승려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당했다.

 

현덕왕후는 1441년 단종을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승하, 경기도 안산군에 예장되었다가 1450년 문종 즉위와 함께 현덕왕후로 추승되면서 능호는 소릉이라 명명되었습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으로 개호되었으며, 같은 해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습니다.

그러나 1456년(세조 3년)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아지와 동생 권자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어, 현덕왕후는 추폐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저 물가로 옮기는 수난을 당합니다. 1513년 중종 8년에 복위되어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되고 신주가 종묘에 봉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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