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7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1397.4.10~1450.2.17 재위 기간 1418.8.~1450.2. 31년 6개월)은 불행한 왕이었다'에 대해 알아봅니다. ​

2024. 3. 8.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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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17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1397.4.10~1450.2.17 재위 기간 1418.8.~1450.2. 31년 6개월)은 불행한 왕이었다'에 대해 알아봅니다. ​

1397년 5월 15일(양력) 태종의 5번째 왕자로 태어나 22세에 왕위에 오른 후 32년 동안 조선을 다스렸던 세종은 조선 역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의 남긴 화려한 업적 뒤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 속에서 고통스러워했던 세종의 모습이 있었다.

세종은 형이자 적장자인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즉위 과정에서부터 많은 번민과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태종은 외척 세력을 막기 위하여 세종의 외삼촌이자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의 네 동생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는 물론,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인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 작은 아버지 동지총제 심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빚어진 비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하여 뿌려진 가족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부담감은 훌륭한 왕이 되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여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국방, 예학 등 각 분야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초기에 잇달아 3번의 국상을 치렀다.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큰아버지 정종이 죽었고, 정종(1400년)의 국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1420년)의 상을 당했다. 그리고 2년 뒤엔 아버지 태종의 죽음(1422년)을 맞았다.

이렇게 계속해서 국상을 치르는 동안 세종은 술과 고기, 기름진 음식을 멀리하고 매일 빈전을 찾아 곡을 하였으며, 탈상 때까지 치러지는 12차례 이상의 중요한 제사에 일일이 참석했다. 세종은 예에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철저하게 모든 예법을 지켰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국상을 치러 낸 세종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쉬지 않고 일에 몰두해서 건강이 나빠졌다.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세종의 질병에 대한 기록이 50여 건에 이른다. 20대 후반 무렵인 세종 6년과 7년에는 두통과 이질에 대한 기록이 있고, 30대 중반에는 풍병과 종기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40대 초반에는 안질과 소갈증(당뇨병)에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수전증, 허손병에 대한 기록과 한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다.

경복궁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풍병을 앓았던 세종 14년엔 <삼강행실도>와 <팔도지리지>를 만들었고, 당뇨병이 진전되던 시기엔 4군 6진을 완성했고, 해 시계와 자격루 등을 제작했다. 더욱이 안질로 반실명이 된 상태에서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 업적을 이루어 냈다. 결국 더 이상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세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문종)에게 섭정을 시켰다. 이때가 그의 나의 47세였다.

세종은 또 다른 슬픔은 사랑하는 자식들이 잇따라 곁을 떠난 일이었다. 세종이 각별하게 사랑했던 맏딸 정소 공주는 13세 되던 해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세종은 48세가 되던 해에 또다시 두 아들을 잃었다.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이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한 달 만에 일곱째 평원 대군이 1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1년 후 사랑하는 아내 소헌왕후(1466년)마저 세상을 떠났다.

세종 영릉_합장01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종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은 세자(문종)가 혼인한지 10년이 넘어서야 원손(단종)을 본 것이었다. 성격이 호방한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에 비해 몸이 약한 세자를 보면서 늘 걱정했던 세종은 아직 어린 원손을 위해 대신 및 집현전 학사들에게 원자를 당부했다. 세종에게 마지막까지 벗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짐이 되었던 후사 문제는 결국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1450년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버린 세종은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막내아들 영응 대군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세종의 나이가 54세 재위 기간은 32년이었다.(1450년 2월 17일)

일과 병고 그리고 가정사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던 세종이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완수했다. 이것이 역대 통치자로서는 유일하게 민족의 스승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이유이며 스승의 날을 세종의 탄신일인 5월 15일로 정한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 일 것이다.

세종 영릉_합장02

참고로 '세종실록'은 1권부터 127권까지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128권부터 163권까지는 지(志)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志)는 일종의 주제별, 사건별 정리 방식으로 오례(128~135), 악보(136~147), 지리지(148~155), 칠정산(156~163) 등으로 되어 있다.

능은 원래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 산에 마련하였다가, 예종 원년인 1469년 3월 6일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성산으로 옮겨졌다. 이승소가 묘지를 짓고, 윤회가 행장을 지었으며, 정인지가 신도비의 글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정인지의 글은 이장할때 원래 능이 있던 곳에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증호는 영릉(英陵)이다. 세종은 정비 1명과 5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정비인 소헌왕후에게서 적자 8명과 적녀 2명, 영빈 강씨 등 5명의 후궁들에게서 서자 10명, 서녀 2명을 얻었다.(18남 4녀, 조선왕들 중에서 아들이 가장 많은 왕 - 건강식으로 수탉 고환을 즐겨 먹었고, 소갈증과 자녀가 많은 걸로 봐서 정력 또한 크지 않았을까?)

세종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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