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19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집현전에 물어보라에 대해 알아봅니다. ​

2024. 3. 10.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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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019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집현전에 물어보라에 대해 알아봅니다. ​

집현전 위치

집현(輯賢) 이란 뜻은 '현명한 사람들을 모으다' 이며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관청이었던 집현전이 실제로 존재했던 기간은 세종 2년에서 세조 2년까지 37년 동안이었다.(1456년 6월 6일 사육신 김문기 사건으로 폐쇄) 그 37년 동안 집현전에서 근무한 96명 가운데 세종이 뽑은 사람은 79명에 이른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이었으며 집현전 관리들은 공부하는 선비라는 뜻에서 학사라고 불렀다.

집현전 학사들은 젊고 비록 관직이 낮았지만 상당한 두뇌 집단이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집현전 학사로 뽑은 사람들은 '재행연소자' 였다. 재행자란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데 대개 과거에 합격했는가가 그 기준이 되었다. <국조방목>을 살펴보면 집현전 학사 96명 중 1명을 제외한 전원이 과거 합격자였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학사들의 평균 나이가 23세로 젊었다.

집현전_수정전

집현전 학사로는 최항, 박팽년, 이개, 신숙주, 서거정, 유성원, 성삼문, 강희안(문인 화가)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집현전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전문 학자 관료들로서 세종은 이들에게 임무를 맡기는 대신, 독서와 연구를 통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학문을 쌓게 하였다. 당시 선비들이 잘 읽지 않던 <사기> <한서> <송감>등 중국의 주요 역사 서적과 두보의 시를 읽어 보도록 권하기도 했으며, 산법(수학)을 익히라는 지시도 내렸다.

<세종실록> 16년에는 세종이 신석견, 남수문, 등에게 중국어를 배우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국 송나라 때의 문물과 제도를 연구하도록 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수문과 신석견 등에게 중국어를 익히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중국어에 능통해지면 그 동안 몰랐던 지식을 얻을 수도 있고 중국 사신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대화를 통해 조선의 관료들이 학문이 깊다는 것을 알리는 외교적 효과를 거둘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 대한 현실감각을 갖고 전문가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책에만 파묻혀 지내는 집현전 학사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집현전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고 왕실에서만 먹던 귤을 하사하기도 했다. 밤늦도록 책을 보다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입고 있던 털옷을 벗어 덮어 준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사헌부에 명해 집현전을 규찰하지 않토록 했다.

세종은 제도적으로도 집현전 학사들에게 특전을 주었는데 바로 관료들에 대한 최초의 유급 휴가였던 '사가독서'였다. 짭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동안 집에서 글을 읽도록 하는 일종의 휴가였으며,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은 세종 8년인 1426년 12월 이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집현전 학사인 권채, 신석견, 박팽년, 성삼문 외에도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등 조선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 '사가독서'를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종의 배려 속에서 집현전 학사들은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 종의 책을 펴냈는데 의학, 풍속, 군사, 정치, 유교, 역사, 지리서 등 대부분 국가 통치와 실생활에 필요한 전문 서적들이었다.

<향약집성방> 의 편찬은 조선 사람의 병에는 조선의 약재가 더 효과적이라는 신토불이 정신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조선의 약재와 효과 그리고 처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삼강행실도> 역시 집현전에서 펴낸 대표적인 실용 서적으로써 집현전 학사 설순 등이 중국과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엮어 놓은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책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넣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백성들도 그림을 보고 좋은 풍속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집현전 학사

그 밖에도 유교 국가로써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편찬한 <자치통감> <국조오례의>와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주요 전쟁의 전적과 그에 대한 평가를 조사하고 정리한 <역대병요> 등이 편찬되었다.

이 책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유교 질서에 바탕을 둔 문화 정치와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는 과학 실용주의 정치를 해 나가려 했으며, 집현전은 그런 세종의 정치를 도와주는 기초 연구 기관이었다.

집현전에서는 세종의 명령을 받아 소금법 연구, 외교용 문장짓기, 약재 조사 외에도 각종 관혼상제의 예법이나 농사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구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세종은 책이 편찬될 때마다 크게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거나 상을 내려 집현전 학사들을 격려하였다.

품계
관직(집현전)
정원
집현전(비고)
정1품
영전사(領殿事)
2명
겸직
정2품
대제학(大提學)
2명
겸직
종2품
제학(提學)
2명
겸직
정3품
부제학(副提學)(당상관)
1명
 
종3품
직제학(直提學)
1명
 
정4품
직전(直殿)
1명
 
종4품
응교(應敎)
1명
 
정5품
교리(校理)
1명
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종5품
부교리(副校理)
1명
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정6품
수찬(修撰)
1명
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종6품
부수찬(副修撰)
1명
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정7품
박사(博士)
1명
 
정8품
저작(著作)
1명
 
정9품
정자(正字)
1명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은 다른 부서로 옮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집현전은 다른 부서에 비해 근무 기간이 길어서(정창손 22년,  최만리 18년, 박팽년 15년 등) 젊은 관료들이 승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관료로서 정치적인 뜻을 펼 수 없는 연구기관이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 1434년 3월 20일)

그러나 세종은 학사들이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평생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라고 당부했다. 집현전은 세종의 재위 기간인 32년 만을 위해 만들어진 연구 기관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를 준비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세종은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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