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6 조선왕조실록 도대체 국모의 자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더란 말이냐! 조선의 첫 여장부 원경왕후 민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7.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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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6 조선왕조실록 도대체 국모의 자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더란 말이냐! 조선의 첫 여장부 원경왕후 민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원경왕후 민씨

원경왕후 민씨(1365.7.11~1420.7.10, 세종 2년) : 태종 이방원의 스승인 여흥민씨 민제의 둘째 딸로 태종보다 2살 많았다. 민씨는 1365년 개성 철동에서 태어나 18세인 1382년(우왕 8년) 이방원(16세)과 결혼하였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자신의 동생들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세력을 제거하는데 기여했다. 방원은 1400년 2월 '방간의 난'을 제압하자 민씨는 정빈에 봉해졌고, 그해 11월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태종의 축첩에 따라 자주 다투고 외척세력을 경계하는 태종에 의해 동생 4명을 죽이는 결과를 맞이한다. 1420년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양녕, 효령, 충령, 성녕 4남과 정순, 경정, 경안<부마 길창군 권규-아버지 권근, 아들 권총, 권담. 권담 딸 권영금-김문기 아들 김현석(영월 군수, 종 4품)의 후처, 계유정난 후 권람에게 정속> , 정선 등 4녀를 두었다.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국모의 자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더란 말이냐!

태조 7년(1398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경복궁 근정전 앞, 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환후가 깊어진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초조한 기색으로 모여들었다. 음력 8월이라 선선한 가을바람이 먹구름과 어우러져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근정전 앞 왕자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면 왕자들을 몰살시키려는 정도전 일파의 술책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방원과 그의 아내 민씨만은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역시 이날을 거사일로 생각하고 일단 경복궁 근정전에 모습을 나타내고 민씨의 집에서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원의 하인 소근이 말을 끌고 나타나 부부인 민씨가 별안간 가슴 앓이를 하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형과 아우들도 기미를 채고 방원을 뒤를 따른다. 민씨는 미리 친정집에 숨겨둔 병장기를 내어주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민씨가 아니었으면 어찌 이런 뛰어난 판단력과 대담성이 발휘되었겠는가?

태조 가계도
유교 명문가 출신

민씨는 개경 철동에서 영흥 민씨 민제와 어머니 송씨 싸이에서 태어났다. 훗날 많은 왕비를 배출한 여흥민씨 가문은 고려 말 유교적인 명문가였다. 민제는 공민왕 때 급제하려 창왕 때 상의밀직, 공양왕 때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 한양 부윤(현 서울시장)을 거쳤으며, 청렴하기로 소문난 학자로 권문세족 이면서도 신흥 사대부의 주자학을 받아들여 그 실천에 힘썼다. 조선 개국 후 영흥 부원군(왕의 장인, 정 1품)에 올라, 하륜, 이무, 조호 등과 뜻을 같이하였고, 문하에 전가식, 조서, 이공의, 옥고 등을 두었다. 태종은 왕에 오르기 전에 민제를 사부(세자 시강원, 정승이 겸임, 정1품)라 부르며 잘 따랐고 존경하였다. 어머니 송씨는 고려 때 종 1품에 해당하는 중대광 여량군 송선의 딸이었으며, 온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민씨는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성장했으며, 18세에 16세인 방원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성계는 신흥 토호 세력으로서 권문세가인 민제와 여흥 민씨 일문인 민선(고려조 찬성사, 방간 장인)과도 사돈을 맺음으로써 기반을 맺었다. 또한 셋째 방의는 고려 10대 가문의 하나인 철원 최씨 일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년 6월 14일 ~ 1396년 8월 13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아내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이다. 작호는 현비(顯妃), 시호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다.

 

정치적 내조자

이성계는 하루가 다르게 고려 조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된 덕분에 천문학적인 재산을 쌓아 놓은 상태로 조선 개국 후 왕실의 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민씨는 방원을 도와 시아버지 이성계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참여한다. 이는 실패하면 가문이 멸망하는 화를 당할 수 있어 온 힘을 다해 돕지 않을 수 없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민씨는 시집온 지 10년 만에 정녕 옹주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왕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개국 후 정계는 정도전, 남은의 재상 중심파와 방원, 하륜, 이숙번 중심의 왕권파로 나누어졌다. 이성계를 추대했던 50여 명의 신하들은 개국초에 공적에 따라 3등급으로 선별되어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조준 같은 일등공신은 수백 결의 전답과 수십 명의 노비를 하사받아 부귀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는 정도전, 남은이 꿈꾸는 재상 중심의 이상 국가와 거리가 멀어 신덕왕후 강씨와 결탁하여 강씨의 아들을 옹립하여 개혁을 추진코자 하였다.

이에 방원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강씨 때문이며, 세자 책봉마저 강씨에 의해 이복동생인 방석에게 밀렸으며 요동정벌을 위시한 사병 혁파까지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1차 왕자의난

태조 7년(1398년) 8월 13일 정도전 일당이 사병 혁파를 주장하고 전처 한씨 소생들을 모두 제거하여 어린 세자의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방원은 그들을 기습 공격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방석 장인) 장지화, 박위, 유만수, 이근 등을 죽이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정도전과 남은은 남은의 애첩 집에서 술을 마시다 변을 당하고 만다. 이때 강씨의 소생인 방번 방석과 경순 공주의 부마 이제(흥안군)이 살해된다. 살아남은 세자빈 심씨는 비구니가 되어 정업원에서 지낸다.

경순 공주는 이리저리 쫓기다 흥천사로 들어갔고 이성계가 강씨 딸을 살리기 위해 친히 머리를 깍아주고 비구니로 만든다.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방우는 어머니 한씨를 소홀히 대하고 고려왕조를 멸망시켰다고 아버지를 못마땅하여 해주 수양산에 들어가 세상과 등을 졌으므로 태조는 둘째 영안대군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2차 왕자의난

2년 후 넷째 아들 회안대군 방간이 지중포부사 박포의 선동으로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 또는 '박포의 난' 으로 또다시 친형제간의 권력 쟁탈전이 일어나고, 방원이 난을 진압하던 중 목인해의 말이 화살에 맞은 채 집으로 돌아오자 민씨는 방원이 죽은 줄 알고 싸움터로 직접 나갑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여성으로 민씨가 없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바꾸었을지도 모릅니다. 훗날 방원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내 모후의 공이 고려 태조의 류씨 왕후보다 더 컷다" 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은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태종은 끝까지 형을 살려 천수를 다하도록 합니다. 세조보다는 덜 독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종의 아내인 정안왕후 김씨는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딸로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빈으로 봉해졌다가 한 달 후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비로 진봉된후 정종에게 선위를 건의해 태종이 왕위에 오르고 순덕 왕대비의 존호를 받습니다. 방원은 마침내 왕위에 오르고 민씨는 정비의 시호를 받아 천하을 얻습니다. 그녀의 친정은 일등공신 집안이 되었고 자신은 꿈에 그리던 국모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춘추관(春秋館)에 왕지(王旨)를 내리었다. 하루 전에 임금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황희(黃喜)·이조 판서(吏曹判書) 박은(朴訔)·지신사(知申事)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민씨(閔氏)가 음참(陰慘)하고 교활(狡猾)하여 원윤(元尹) 이비(李)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자를 사지(死地)에 둔 죄를 갖추 써서 왕지(王旨)를 내리고자 하다가, 제술(製述)한 것이 뜻에 맞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박은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이 비록 음식을 대하여서라도 인군의 다수(多壽)하고 다남(多男)하기를 축원하는데, 왕자(王子)가 태어난 날에 어찌 이러한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왕지를 내리지 않더라도 신 등이 이미 들었으니, 감히 묵묵히 있고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지하기를,

"내가 다시 상량(商量)하겠으니 경 등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틀 후에 경승부 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을 불러 왕지(王旨)를 지어 춘추관(春秋館)에 내리었다.

"임오년(1402년) 여름 5월에 민씨(閔氏)의 가비(家婢)로서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가 임신하여 3개월이 된 뒤에 나가서 밖에 거(居)하고 있었는데, 민씨가 행랑방에 두고 그 계집종 삼덕(三德)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산삭(産朔)이 되어 이 달 13일 아침에 태동(胎動)하여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삼덕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 형으로 이름이 화상(和尙)이라는 자가 불쌍히 여기어, 담에 서까래[椽木]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리웠다. 진시(辰時)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이다. 그날 민씨가 그 계집종 소장(小庄)·금대(金臺) 등을 시켜 부축하여 끌고 아이를 안고 숭교리(崇敎里) 궁노(宮奴)인 벌개(伐介)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 두고, 또 사람을 시켜 화상이 가져온 금침·요자리를 빼앗았다. 종 한상좌(韓上佐)란 자가 있어 그 추위를 무릅쓰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어 마의(馬衣)를 주어서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가 또 그 아비와 화상으로 하여금 데려다 소에 실어 교하(交河)의 집으로 보냈다. 바람과 추위의 핍박과 옮겨 다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또 유종이 났으니, 그 모자가 함께 산 것이 특별한 천행이었다. 내가 그 때에 알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가 기어다니는 것을 사람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여러 민(閔)가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대개 그 종지(宗支-왕의 자손)를 제거하기를 꾀하는 생각이 마음에 쌓인 것이 오래 되었으므로, 그 핏덩어리(경녕군)에게 하는 짓이 또한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그러나 천도가 밝고 어그러지지 않아서,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고 편안하게 한 것이 지극하였다. 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 가의 음흉한 일이다.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능히 알겠는가? 참으로 마땅히 사책(史冊)에 상세히 써서 후세에 밝게 보이어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왕지가 이미 내려지자, 지관사(知館事) 이숙번(李叔蕃)이 왕지를 적어 대간에 이문(移文)하고자 하였다. 영관사(領館事) 하윤(河崙)이 지체하므로 이숙번이 위태한 말로 하윤을 공동(恐動)하니 하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도대체 국모의 자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더란 말이냐!

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은 민씨였다. 그러나 태종은 후궁들과 가깝게 지냈다. 태종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니 후궁이 12명이나 되었고 12남 17녀를 두었습니다.

효빈 김씨는 민씨의 여종이었으나 방원과 정을 통해 임신을 하여 민씨가 계집종 삼덕과 함께 두어 죽이고자 하였으나 훗날 경녕군(이비)를 낳았다. 이로 인해 태종은 민씨 일가를 배척하게 됩니다.

민씨는 두 살 어린 태종에 대한 배신감으로 둘 사이는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다. 한편 민씨 가문의 민무구와 민무질은 자신들의 공을 떠벌리고 다녀 이를 두고 민씨는 "너희들이 너무 교만한 것을 알지 못하고 고치지 못하면 반드시 파하는 수가 있다'라고 경계하였다.

민씨의 첫째 양녕대군은 민씨의 친정집에서 키워지는데 이는 훗날을 대비한 포석으로 민씨 집안의 권세를 이어갈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에 태종은 후궁을 늘려가면서 민씨와 불화가 깊어지고 관계도 소원해졌다. 태종이 민씨 집안에 혐의를 둔 최초의 사건은 양녕대군의 청혼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태종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하는 고명을 가지고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양녕을 명 황제의 딸과 혼인시켰으면 한다는 의중을 비추었으나, 그 후 명나라 사신이 다시 왔으나 아무런 대꾸가 없자 태종은 두 번 다시 명나라 공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도록 하였으나, 신하들은 태종 모르게 민제를 찾아가 논의한 끝에 혼인 이야기를 사신에게 전하기로 한다. 민제는 그의 조카 조박(방원과 동서지간, 민씨의 형부)을 시켜 하륜에게 이러한 내막을 전달하게 하고, 하륜은 좌의정 조영무와 우의정 성석린에게 전한다. 두 사람은 반대하지만 조영무가 이런 내막을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에게 전했고 태종에까지 알려진다.

태종은 크게 분노하고 태종 7년(1407년)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옥이 일어난다. 1차 선위 파동 시 민씨 형제들이 당파를 만들어 어린 세자를 끼고 집권을 기도했다는 죄명으로 모두 귀양 보냈지만 민제에 대한 신임으로 별 탈이 없었다. 민제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 대신들은 민무구 형제를 처형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태종 10년(1410년) 죽임을 당한다. 민씨는 동생들이 죽었다는 말에 충격으로 몸 져 눕는다.

6년 후 두 동생 무휼 무회 또한 양녕대군을 만난 자리에서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하여 처형 당하고 만다.

민무구(1369~1410, 태종 10년), 민무질(1372~1410, 태종 10년) 형제 :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첫째, 둘째 동생. '제1차 왕자의 난' 및 태종 즉위에 큰 공을 세워 정사, 좌명공신. 세자 양녕을 키워 권세를 찌름. 태종은 이숙번과 하륜을 이용하여 죄인으로 몰아 유배 보냄. 셋째 무휼 넷째 무회도 1416년 두 형의 죽음을 호소하다 사사됨.

양녕대군(1394~1462, 태조3년~세조8년, 69세 졸) : 이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 1407년 14살에 김한로의 딸과 혼인.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 어리 자살함-서녀 출생(정3품 현주), 며느리 범함, 아들 자결.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 및 단종을 죽이도록 간청함.

"사랑 사랑 내 사랑 술과 어리 내 사랑 주야 장천 못 올님 어화 어리 내 사랑"

효령대군(1396~1486, 태조5년~성종17년, 91세 졸) : 이보.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 아들. 1418년(태종 19년)에 양녕이 폐위되자, 태도를 삼가고 글 읽기에 열중하였으나,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절에 들어가 불도에 전념했다. 부인은 해주 정씨 정역의 딸로 6남 2녀를 낳았다. 그 외에 서자녀 1남 1녀가 있다.

태종 원경왕후_헌릉

멸문지화를 당한 여장부 민씨는 국모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친정이 쑥대밭이 되고 폐비의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아들인 양녕, 효령, 충녕이 곁에서 힘이 돼주었기 때문이었다. 민씨의 마지막 시련은 막내 성녕대군이 완두창으로 1416년(태종 16년)에 죽고 만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민씨는 성녕대군의 묘 옆에 대자암(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위치)을 짓고 명복을 비는 것으로 하루하루 인내하며 살아갔다.

민씨는 모든 것을 체념하면 지내다가 세종 2년(1420년) 학질에 걸려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헌릉이며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묘호는 원경태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숙종 때 송시열의 상소로 원경왕후로 수정되었다. 조선의 여장부에서 가문이 쑥대밭이 된 비운의 왕비 민씨.

국모라도 자신의 운명이 남편의 행동 여하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 유교 사회는 조선 여인들에게 고달픈 삶이었다.

"도대체 국모의 자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더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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