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7 조선왕조실록 남편은 세종대왕 그러나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 소헌왕후 심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8.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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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7 조선왕조실록 남편은 세종대왕 그러나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 소헌왕후 심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소헌왕후 심씨

남편은 성군 세종, 그러나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조선시대 찬란한 문화업적이 세종대왕 때 모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현전을 통한 많은 인재의 배출,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의 정비,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작업,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비, 공법의 국민투표 및 제정, 국토의 확장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방대한 치적 뒤에는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낸 한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이 바로 세종대왕의 아내 소헌왕후 심씨였다.

소헌왕후 심씨(1395.9.~1446.3.24, 52세, 태조4년~세종28년) : 아버지는 영의정 청송 심씨 심온,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순흥안씨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양주에서 태어났으며 14세인 1408년 두살 아래인 충령대군 도와 혼인.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함. 1418년 6월 경빈으로 봉해지고 12월에 왕비(공비)로 책봉. 강상인의 옥으로 아버지 심온이 죽자 박은 조말생등이 폐비를 주청하였으나 세종이 극구 변호함. 그녀의 어머니 안씨까지 천비로 전락. 52세 졸. 영릉에 세종과 합장. 아들 8형제(문종,세조,안평 등) 와 두딸(정소,정의)을 둠. 조부 심덕부 문하좌시중, 좌정승, 부 심온 영의정, 아들 심회(소헌왕후 동생) 영의정 - 조선 3대 최초 수상, 부 심온(5남)이며, 작은아버지 심종(6남)은 태조 경선공주 부마. 작은아버지 동지총제 심정은(7남), 외삼촌 안수산.

출처 입력

국모가 된 심씨

심씨는 양주땅의 명문집안인 청송 심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심덕부는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다가 부친 심덕부와 함께 조선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이며, 숙부 심종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의 부마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였다. 아버지 심온은 풍해도 관찰사시 병기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 박영우를 파직시키기도 하였고, 변정도감 제조, 형조판서때는 권세가에 의해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 사업에 주력하였다. 그후 호조판서, 좌군총제, 한한성부사, 이조판서, 공조판서등 여러 요직을 두로 거친후 세종때 영의정이 되었다.

어머니 순흥안씨는 정직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조선초 좌의정을 지낸 안천보의 딸이었다.

세종 가계도

이러한 집안에서 자란 심씨는 항상 정숙하고 덕에 치중하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심씨는 14세 때 12세인 충령대군 세종과 혼인하여 경숙옹주로 봉해졌다. 그후 태종 17년는 삼한국대부인으로 다시 봉해졌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1418년 6월 경빈으로 봉해지고 12월에 왕비(공비)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또한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영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세종과도 금슬이 좋아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자녀를 많이 두었음에도 세종은 8명의 후궁을 거느렸는데 그 사이에서 10남 2녀를 두었다. 그녀는 예로서 후궁을 다스리고 그 소생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친저녀들도 더 정성을 들였다. 결과적으로 후궁들은 심씨를 부모처럼 공경하며 받들어 불화가 생길 틈이 없었다. 시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심온_심정

강상인의 옥(1418년, 세종1년) : 태종은 심온에게 국구의 예로서 영의정에 제수하고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는데, 심온 환송행렬이 장안을 메웠다는 소리를 듣고, 아우인 도총제 심정 및 병조참판 강상인이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 알리지 않는등 태종을 분노케 해, 우부대언 원숙,병조좌랑 안헌오, 좌의정 박은(반남 박씨, 어효첨 장인, 47세 좌의정)등의 주청으로 병조판서 박습(참형, 딸-김문기 아들 김현석의 본처), 이조참판 이관(참형), 병조참판 강상인(거열형), 병조참의 이각(유배), 병조좌랑 채지지(유배), 동지총제 심정(참형), 영의정 심온(44세, 자진-유정현 말을 듣고 이해)을 처단한 사건.

세자빈 김씨

몰락하는 친정

태종은 자신의 처가인 민씨 집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멸문시킨바가 있듯이, 심씨 일가도 세력이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겠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앉아 병권을 틀어쥔채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면서 강상인의 옥을 일으켜 아버지 영의정 심온, 작은아버지 동지총제 심정, 병조판서 박습, 이조참판 이관, 병조참지 강상인 등이 처형되고 병조참의 이각, 병조좌랑 채지지가 유배되며, 어머니 안씨는 관노비가 되어 몇 년동안 딸과 만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심씨의 죽음은 박은의 무고에 의한 것임이 밝혀져 그의 관직은 복위되었고, 어머니 안씨는 문종때 복권되었다. 심온의 유언으로 청송 심씨와 반남 박씨 집안은 절대롤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졸지에 친정이 몰락한 심씨는 망연자실 하였고, 시어머니 민씨의 집안 몰락때와 같이 아무 힘도 쓸수가 없었다. 다만 신하들이 태종이 죽고나면 심씨의 복수가 행해질지도 모른다고 하여 폐출을 주장했지만, 태종은 심씨가 자손이 많고 세종의 적극 변호에 따라 왕비로 남겨두었다.

조선의 그 어느 임금보다 호색이었던 세종은 내명부에 의한 풍파가 없었다. 이는 심씨가 궁중 곳곳에 사람을 심어놓아 후궁들의 동향을 파악하였으며,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문제가 복잡한 4난 임영대군(화차 제작) 및 다른 후궁들의 왕손들도 이런식으로 관리했다.

세자빈 봉씨

세 번이나 바뀐 왕세자빈

폐비의 위기에서 벗어난 심씨는 불교에 귀의하여 가슴에 상처를 달래며 지냈다. 그러나 궁중은 바람잘 날이 없었다. 세자빈을 두번이나 폐출시켰으며, 세번째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다음날 세상을 떠났고, 4남 임영대군과 8남 영응대군의 부인도 병 때문에 쫒아내야 했다.

심씨의 첫째 아들 세자 향(문종)은 여성에게 관심이 적었고 부부 금슬이 썩 좋지 않았다. 세자가 14세때 첫번째 세자빈 김씨는 18세의 과년한 당시 무관 상호군 김오문의 딸로서 절세미인이었다.

이 시기 예조에서는 여자 나이 14세에서 20세까지는 모두 혼인하도록 법으로 정하였는데, 이는 해마다 명나라에서 공녀를 선발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세자빈 김씨

세자가 어렸을때 놀았던 시비들과 주로 어울리고 김씨를 찾지 않자, 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비방을 자주 사용하였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잘라 불에 태워 재를 술에 따서 마시는 비방, 교접하는 뱀을 잡아 가루로 만들어 먹는 비방, 마초라는 덩굴풀로 벌레가 생기면 길러 나비가 되었을 시 잘 말려서 지니고 다니는 비방, 붉은 박쥐 가루를 사용하는 등 해괴망측한 비방을 시전하여 심씨는 폐출을 시키고 만다. 친정으로 돌아온 김씨는 김오문는 준비한 사약을 모녀와 함께 마시고 자결해 버렸다.

김씨 폐출후 이틀만에 금혼령을 내리고 3개월만에 봉여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봉여는 조선 초기의 명신으로 형조, 병조, 이조판서를 거친 뒤 지돈령부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예조에서 세자도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세종 12년(1430년) 세자의 후궁을 종2품 양제, 종3품 양원, 종4품 승휘, 종5품 소훈 등으로 법제화했다.

이에 세종은 친히 권전(단종의 외조부, 1441년 사망)의 딸, 정갑손의 딸, 홍심의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봉했다.

세자빈 봉씨_소쌍_석가이

세자(문종)는 후궁들에게 관심이 쏠렸고 봉씨는 독수공방에 지쳐 저녁이면 술상을 들여 시비 소쌍, 석가이와 동성애를 하였다. 궁녀들은 통상 한방에 거쳐하면서 방동무, 벗 등으로 부르며 엉덩이에 붕이라는 문자를 문신하는등 동성애를 했다고 한다. 세종은 이를 근절하고자 동성애자에게 곤장 70~100대를 쳤으나 근절되지 않아 삼강행실도를 배포하였으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세자 23세때 봉씨를 폐출시켰다. 아버지 봉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봉씨는 의지할 데 없이 스스로 목을 맨다.

후궁중 딸을 낳은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하고 세종 23년(1441년) 7월 왕세손(단종)을 낳았으니 세자가 혼인한지 14년만에 낳은 귀한 왕세손이었다. 그러나 권씨는 단종을 낳고 그 다음날 사망하고 만다.

세종 영릉

눈물과 한으로 점철된 삶

평생을 풍파속에서 보낸 소헌왕후 심씨는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스무살 안팎의 나이로 요절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상심한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세종 28년(1446년) 52세의 나이로 한을 가슴에 품은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종은 심씨를 칭송했다.

"우리 조종 이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 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선왕(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시었다."

세종은 심씨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궁궐 안에 내불당을 짖고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 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석가의 일대기를 '석가보' '법화경' '지장경' '아미타경' '약사경' 등에서 발췌하여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문종도 외할아버지 심온을 신원함으로써 평생을 한과 눈물로 살았던 심씨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소헌왕후 심씨의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의 영릉으로 조선 최초로 세종과 합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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