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5 조선왕조실록 국정에서 배제되는 왕비들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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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5 조선왕조실록 국정에서 배제되는 왕비들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신덕왕후 강씨

유교사상을 강요받고 국정에서 배제되는 왕비들

조선조 5백 년을 지배한 유교사상으로 여성들은 오로지 가정만을 지켜야 할 뿐 국정은 물론 사회생활조차 참여할 수 없었다. 또한 한번 혼인한 여성은 다시 재혼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규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국 초만 하더라도 고려의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과부재가 금지라는 제도 아래서도 두 번 이상 혼인한 어머니를 둔 공신들이 많았다.

당시 여성들의 권한은 나름대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혼인제도와 상속제도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예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에 따라 혼인한 후 사위가 오랜 기간 동안 처가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재산상속과 제사 봉사에서도 남녀 구별을 두지 않았다. 재산은 모든 자녀가 똑같이 상속을 받았다. 현재 우리나라 상속제도와 같다. 제사의 경우도 아들딸 예외 없이 모든 자녀들이 돌려가며 모시는 훈회 봉사와 재산 상속 등에서 특혜를 받은 한 자녀만이 모시는 분담 봉사가 원칙이었다. 이것 역시 고려의 풍습이 그대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거나 습골 해서 불사에 안치하고 불교의식대로 제를 올렸다. 그래서 굳이 적장자가 나설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여성들이 제를 주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혼인이나 상속제도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대부들의 정책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적 여성관을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 적용 대상이 된 것이 왕비들이었고, 이들은 조선의 기반 확립을 위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비들은 조선의 개국과 개국 초기 체제 확립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국정에서는 배제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강력한 유교적 가부장 체제를 표방했기 때문이었다.

태조 가계도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 왕후 한 씨

태조 이성계는 두 명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고려 시대는 일부다처제였던 반면에 조선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법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둘째부터는 첩이 되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고려 시대의 관습대로 향처, 경처 가 있어 상대적으로 젊은 경처는 향처가 일구어 놓은 것들을 쉽게 차지해버려 결국 둘 사이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첫째 방우는 아버지가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에 빠져 향처인 자신의 어머니인 신의왕후를 소홀히 함에 불만을 품었고,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술에 빠져 살다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한씨는 태조보다 2세 연하로 고려 동북지방 영흥 땅에서 안천 부원군 한경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관인 연변은 조상 3대가 묻혀있는 한미한 곳으로, 한씨가 15세 되던 때 신분이 엇비슷한 이성계와 혼인하여 함흥 운전리에서 살게 되었다. 한 씨는 6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진안대군 방우, 둘째 영안대군 방과, 셋째 익안대군 방의, 넷째 회안대군 방간, 다섯째 정안대군 방원, 여섯째 덕안대군 방연, 그리고 딸 경신공주와 경선공주이다.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로 있을 때, 삼선, 삼개의 난을 진압하여 봉익대부 밀직부사에 오르자 한씨는 원신택주로 봉해졌다. 삼선, 삼개는 공민왕때 여진족의 장수들로, 원래는 이성계의 할아버지 춘의 외손자였지만 여진 땅에서 자라 장수가 되었던 것이다. 서북면에서 최유의 침입을 격퇴한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철관으로 돌아와 한망신, 김귀와 합류하여 삼선과 삼개를 격파하고 화주 이북 땅을 모두 회복하였다.(1364년)

최유(?~1364) : 고려 말의 반역자, 1342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여러 악행으로 원과 고려 양쪽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성계와 최영에게 패한 후 원나라에 원정군을 청했으나, 원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칼을 씌워 고려로 돌려보내, 결국 최유는 대역 죄를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출처 입력

한씨는 우왕이 통치하던 시절,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포천의 재벽 동의서 거주하다가 동북 면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다. 이때 아들 방원이 한씨를 모시고 다녔다. 위화도 회군(1388년)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한 씨는 병을 얻어 1392년 5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해풍군 치속촌에서 치러졌다. 이는 조선이 개국되기 10개월 전으로 조선 개국 다음 날인 7월 17일 시호를 절비라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였다. 그 후 2대 왕 정종 때 신의태왕후로 추존하였다. 숙종 때 송시열의 상소로 신의 왕후로 수정되었다.

한 씨는 결국 조선 첫 왕후로서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신덕왕후 강 씨의 몫으로 돌아갔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이후 아들 이방원에게 이루어주게 된다.

신덕왕후 정릉 안내도

정략결혼으로 만남 비운의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 강씨

신덕왕후 강씨는 황해도 곡산에서 상산 부원군 신천 강씨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고려 시대 권문세족으로 아버지 강윤성, 작은 아버지 강윤충과 강윤휘는 충혜왕 때 세도를 떨쳤다. 강윤휘의 아들인 상장군 강우는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쌍성총관부의 쌍성 만호 이자흥의 사위였다. 따라서 이성계와 강씨 집안은 겹사돈관계에 있었다. 윤휘는 충정왕 때 판도사 판서를 지냈으며 아버지 윤성은 충혜왕과 충목왕 때 찬성사가 되었다. 강씨 오빠 강순룡은 숭문소감의 지위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었다.

고려 말 권문 세력의 배경을 가진 강씨가 이성계의 경처가 된 것은 그 집안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강씨는 이성계보다 21세나 어렸으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무안대군 방번과 둘째 의안대군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이다.

야사에 따르면 강씨는 미모가 빼어나고 지모가 남자들보다 뛰어나, 이성계에게 적절한 자문을 하는 등 정치적 동반자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성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정할 만큼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포천 철현의 전장에서 따로 살림을 하고 있다가 변고를 대비해 동북 면으로 피하여 이천에 있는 한충의 집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신덕왕후 정릉

공양왕 4년(1392년) 해주에서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낙마로 꼼짝없이 자리에 누었을 때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할 기회로 삼고 공양왕을 움직여 정도전 조준 등을 탄핵하여 지방으로 쫓아냈을 때, 이방원은 한 씨가 죽은 뒤 묘막을 짖고 3년 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강씨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왔던 방원은 급히 해주로 가서 이성계를 빼오고, 정몽주가 이성계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린다. 거사에 실패한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이성계를 죽일 수 있도록 주청을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선죽교에서 이성계 병문안을 마치도 돌아가는 길에 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사망한다. 이때 이성계가 방원에게 왜 함부로 대신을 죽였느냐며 꾸짖었으나 강씨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무마시켰다. 이로써 고려는 멸망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가 58세에 조선을 건국하고 왕후에 오른 강씨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아들을 왕세자로 세우기 위해 개국공신 정도전을 포섭한다. 태조는 나이도 들고 판단력이 흐려져 사랑하는 강씨의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4년 만인 1396년 8월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한다.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년 6월 14일 ~ 1396년 8월 13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아내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이다. 작호는 현비(顯妃), 시호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다.

흥천사_서울 성북구 돈암동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내가 사가에 있을 때 조정과 외방에 일이 많았고 나라를 세우는 날까지 오직 신덕왕후의 내조가 참으로 많았소.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역시 부지런히 보살피며 바르게 간언하여 도움이 많았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잠언을 들을 길이 없소"라며 안타까워하며, 친히 묏자리를 정해 신덕왕후로 정하고 능을 정릉이라 하였다. 태조는 신하들이 주청한 공신수릉제를 받아들여 공신 안평군 이서를 수릉관으로 정해 3년 동안 능을 지켰으며, 환관 김사행의 건의로 1397년 흥천사(두포사<豆泡寺>라고도 함, 동종이 덕수궁 광명전에 보관)를 짓고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흥천사 조성기를 권근에게 짓게 하였다.

방원은 정도전의 요동정벌에 따른 사병 혁파에 반발하고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 방석, 경순 공주의 부마 이제(이인임의 조카 흥안군), 남은, 심효생 등을 죽인다.

이방원은 강씨를 서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태종 9년(1409년) 강씨의 묘를 사을한록의 산기슭으로 옮겼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 위로 이장하도록 했다. 태종 12년에는 강씨의 제사를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 예에 따라 3품관으로 대행하게 하였다. 훗날 태종서얼 금고령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태종은 1410년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를 태조의 유일한 정비로 종묘에 부묘하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다음, 그해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구 정릉의 석물 중 일부인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다.

그로부터 200년 후인 선조 14년(1581년) 삼사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구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그 후 현종 10년(1669년)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판중추부사 송시열의 상소에 따라 강 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실로 서모로 강등된 후 약 300년 만에 다시 왕비로 복권될 수 있었다. 그해 11월 신덕왕후가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비가 쏟아져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했다.

고려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나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았지만, 사후에 방번 방석뿐 아니라 사위 이제까지 잃었으며 큰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는 등 비운의 왕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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