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8 조선왕조실록 단박에 읽는 조선왕조사 - 한나라 여후 같은 소혜왕후 한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9.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728x90
반응형

연재 028 조선왕조실록 단박에 읽는 조선왕조사 - 한나라 여후 같은 소혜왕후 한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소혜왕후_인수대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세조 가계도

항우를 쓰러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재위 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여자의 몸으로 한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이가 바로 유방의 처 여후이다.

결혼하기 전 여후의 아버지는 장쑤성의 수령 댁에 몸을 피신하던 중 일개 하급관리인 유방이 찾아와 위로금 1만 냥을 내놓겠다고 허풍을 떨었다. 이때 관상을 본 여후의 부친은 유방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고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게 된다.

여후

여후는 항우를 쓰러뜨린 일등공신 한신을 궁중으로 유인해 주살시키고, 약골인 아들 효혜제를 대신해 정무를 맡아 유방의 첩 척부인과 그의 아들 여의를 효혜제가 사냥간 틈을 이용해 독살하고, 척부인은 사지를 잘라 화장실에 버린다. 효혜제는 충격에 쌓여 23세에 세상을 떠난다.

자식이 죽었음에도 정권욕에 사로잡힌 여후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

예종 가계도

살인마 같은 수양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으니, 의경세자(덕종 추존) 와 해양대군이다. 두 아들 모두 오래 살지 못한다. 단종을 죽인 죄값이었으리라.

큰아들 의경세자(1438.9.15~1457, 20세 졸, 경릉)는 단종모인 현덕왕후 권씨의 원혼에 시달려 20세에 죽는다. 차남 해양대군(예종1450~1469.11, 20세 졸) 역시 즉위한지 1년 2개월만에 죽음을 맞이하니, 모후인 정희왕후 윤씨(세조 비)는 권신인 한명회와 작당하여 예종의 원자인 제안대군(1466~1525, 당시 4세, 순천박씨 영의정 박중선의 사위, 현숙공주1464~1502, 임사홍의 차남 임광재와 혼인) 대신 소혜왕후(수빈, 인수대비1437~1504.4.27, 21세에 청상과부, 68세 졸)의 둘째 자을산군(성종1457~1494)을 보위에 앉혀 섭정을 한다.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는 덕종의 후비로서 월산대군(1454~1488)과 자산대군을 낳았다. 소혜왕후는 청주 한씨로 서원부원군 한학<대명외교 총수, 세조 책봉을 받아오던중 객사1456.10.>의 둘째딸이자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의 고모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20세 떠나 24세에 순장됨)이었고, 언니는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의 소생 계양군의 아내가 되었다.

한확(1400~1456.10.19) : 청주 한씨로 고려 시중을 지낸 한강의 후손이며, 순창군수(종4품) 한영정의 아들이다. 음서로 부사정(종7품)에 오름. 누나를 명나라 공녀로 보내 영락제 주체의 여비 한씨로 책봉되고 본인은 광록시소경<정5품>의 벼슬을 지냈다. 미풍준정으로 외모가 좋아 황제의 부마로 거론되기도 함. 명 선종 선덕제에게 누이를 진상함(공신부인에 봉함). 첫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에게 둘째 소혜왕후는 의경세자에게 시집 보냄. 3남은 세종의 적녀였던 정의공주의 차녀와 혼인함.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시아버지인 세조를 도와 왕위찬탈에 기여 했고, 한명회와 사돈관계(자산군-공혜왕후 한씨, 18세 요절)를 맺었으며, 경전에 조예가 깊어 범어까지 익혀 불경(29편, 2,805권)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1475년 성종6년, 7장 3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인사(덕종 경릉의 능침사)를 재건축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수국사_정인사

한씨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상으로 매우 유교적이어서 이런 엄격함은 세조 및 정희왕후로부터 폭빈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세조는 며느리를 효부라 항상 칭찬하였다. 정희왕후 윤씨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4세)를 제치고 한씨의 아들 자산군에게 보위를 준 것은 한씨가 윤씨와 자녀들(월산, 자산-한명회 사위, 명숙공주-홍응의 아들 당양군 홍상과 혼인)에게 바친 정성에 대한 보답이었다.

경릉_덕종(의경세자)

한씨는 며느리 중전 윤씨(연산군 모, 폐비)가 투기가 심해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자 진노하여 폐비롤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안중경 매수) 뿐만 아니라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 귀인 엄씨와 합세하여 끝내는 사약을 폐비 윤씨에게 내린다.<내훈을 지었으나, 성종의 여인은 15명 자녀는 30명으로 후궁들간 투기가 심하였다>

수빈릉_소혜왕후릉_인수대비릉

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생모인윤씨가 폐비된 사실은 오로지 소혜왕후의 계략임을 알고, 이복동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강제로 끌고와 할머니더러 손자들에게 술을 따르라고 윽박지른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박치기로 생을 마감한다.<자신이 믿는 불교의 업이요 인과응보 였을까?>

한씨는 남편 의경세자 덕종과 함께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경릉)에 안장되어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