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9 조선왕조실록 사후 50년 만에 눈을 감다 문종비 단종모 현덕왕후 권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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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9 조선왕조실록 사후 50년 만에 눈을 감다 문종비 단종모 현덕왕후 권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현덕왕후 권씨

후궁으로 들어와 세자빈에 오르다

세자 향은(문종) 아내를 세번이나 맞이한 불우한 남자였다. 첫번째 아내 김씨는 해괴한 짓을 일삼다 쫒겨난 후 아버지와 함께 자결해 버렸다.

세자빈 김씨

다시 맞이한 순빈 봉씨는 처음에는 마음이 끌렸으나, 예조에서 세자도 후궁을 들여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러한 예조의 건의에 따라 세자의 후궁은 권전의 딸, 정갑손의 딸, 홍심의 딸 모두 종4품인 승휘로 봉했다. 세자는 후궁이 3명이나 되자 세자빈 봉씨와는 점점 멀어졌다.

세종 18년 승휘 권씨가 세자빈보다 먼저 딸(경혜공주, 부마 정종)을 낳았다. 봉씨는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시비들과 동성애에 빠졌다. 이일로 봉씨는 폐출되고 후궁중 권씨가 홍씨를 누르고 세자빈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세자빈 봉씨_소쌍_석가이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가례를 올려야 한다는 의견과 안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으나, 세자로 있던 문종은 가례를 생략하자는 의견을 내 가례는 생략되었지만 이 일은 훗날 엄청난 후환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권씨의 시조는 김행으로 신라때 경북 안동(복주)을 지키다 왕건에게 항복하여 왕건이 김행에게 권다고 있다하여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 아버지 권전, 어미니 최아지 모두 고려때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조선이 들어온 후 집안이 한미해져 권씨를 후궁으로 들여야 했다.

권씨가 세자빈에 들어서고 영화를 누리기도 전에 그녀 나이 24세에 단종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문종_현덕왕후(단종 출산후)

이에 세종은 후궁 혜빈 양씨에게 단종의 양육을 부탁하였다. 문종이 왕위에 등극하자 현덕왕후로 추봉하고 능을 소릉이라 하였다.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문종은 나이 27세에 후궁을 맞이하였으니 그녀는 사칙양씨로 경숙옹주를 생산한다.

현덕왕후 권씨(태종18년, 1418.3.12~1441.7.24) : 아버지는 안동 권씨 화산부원군 권전(1371~1441)이며 어머니는 최아지(문종 장모, 1456년 단종복위운동시 아들인 권자신<현덕왕후 아우>과 처형됨)로 홍주 합덕현에서 태어났으며, 1431년(세종 13년) 14세의 나이에 세자 향(문종)의 후궁으로 뽑혀 동궁에 입궐 승휘(종4품)에 책봉. 이후에 양원(종3품)으로 승진. 당시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 순빈 봉씨 폐출(1436년), 세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됨. 단종을 낳은지 이틀만인 1441년 동궁의 자선당에서 2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함. 문종때 왕후로 추봉됨, 능호는 현릉이다. 1남(단종-1441년생) 1녀(경혜공주-1435년생, 부마 영양위 정종)

정종(鄭悰, 1437년 ~ 1461년)조선의 문신이며, 문종부마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참판 정충경(忠敬)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년)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봉하여졌다. 영조34년에 영양부원군(寧陽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 단종 초기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가, 1455년(단종 3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금성대군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456년(세조 2년)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 통진을 거쳐 전라도 광주에 안치되었고, 1461년에 승려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당했다.

 

생모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단종은 왕실의 첫아들이라 사랑과 관심 속에서 별 탈 없이 자라났다. 세종은 손자 단종을 특별히 아끼고 총애하였다. 단종은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고, 세종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에게 단종의 앞날을 부탁했다. 아들 문종이 허약체질이라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던 것이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10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다. 문종은 신하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연을 남기고 즉위 2년뒤 승하하자 단종은 12세에 왕위를 계승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죽고 없어 홀홀단신으로 남겨진다. 혜빈 양씨는 후궁의 몸으로 아들 세명이 있었으나(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정치적 실권이 없었다.

비명횡사하는 어린 아들 단종

집현전은 원래 중국의 한나라, 위나라 이후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때 정비된 유교경전의 간행과 서적수입 등을 주로 하는 학문연구기관이었다. 국내에서도 고려 인종때 집현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조선 세종때 문신들을 뽑아 집현전에서 인문학을 진흥시켰다. 세종은 말년에 병이 악화되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어, 의정부 사서제를 고안해서 육조에서 올라온 안건들을 3정승이 포진한 의정부에서 심의를 거쳐 왕에게 결재받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3정승들의 권한이 막강해졌다. 그후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세자로 있던 문종이 세종 24년부터 세종 38년까지 8년간 대리청정을 하였다. 이 기간동안 세자를 보필하던 집현전 학사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졌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단종은 12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조정은 두파로 나눠진다. 한 파는 고명대신들로 황보인, 남지(정분), 김종서등 3정승과 집현전 관료출신들이었으며, 황표정사로 실권을 황보인과 김종서가 장악하게 된다.

또 다른 세력은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왕족세력으로 수양파와 안평파로 나뉘어 진다. 수양은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가례도 없이 후궁출신인 권씨의 소생이 왕이 되었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단종은 삼촌인 수양과 금성에게 자신을 보필해 달라고 부탁했다. 금성은 정권욕이 없이 단종을 돕고자 했으나 수양은 야심이 넘쳐났다.

고명대신파들은 수양의 세력이 커지자 위협을 느껴 안평을 끌여들이자, 수양은 권람, 한명회, 신숙주를 끌어들이고,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무사들을 수하로 두고 단종 1년(1453년) 10월 10일 김종서를 필두로 대신들을 숙청한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안평대군을 추대하기 위해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이었다. 안평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교동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정변이 계유정난으로 세조는 영의정부사, 이조 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한다. 또한 역모를 염려해 금성 및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고 왕위를 강탈한다.

사육신 삼중신 김문기 묘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단종 복위 세력은 세조2년(1456년) 6월 1일, 세조와 단종이 명나라 사신(김흥, 윤봉)을 향응하는 창덕궁 연회장에서 기회를 틈타 별운검을 통해 세조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한명회, 신숙주 및 세조의 반대로 별운검을 취소하고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김질과 정창손의 밀고로 김문기 박팽년 성삼문 주도의 사육신 사건은 발각되고 수백명의 대신들이 능지처참 및 사사되고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다.

그후 9월에 다시 제2차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순흥부사 이보흠 및 영남 인사들이 죽임을 당한다. 혜빈양씨의 아들 한남군과 영풍군도 귀양을 떠나게 된다. 이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다시 폐서인 된다. 이에 정인지, 정창손, 한명회, 신숙주등이 계속 단종과 금성대군의 치죄를 상주하자 세조는 두사람에게 사약을 내린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폐릉되는 권씨의 묘

세조는 제1차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된 권씨의 어머니 최아지, 동생 권자신를 능치처사하고, 이미 죽은 아버지 권전은 폐서인되었다. 세조 3년(1457년) 6월 세조의 측근들은 현덕왕후 권씨를 폐서인하고 폐릉을 상소하였다. 야사에 세조의 꿈에 권씨가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라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한다.

 

 

이후 세자 의경세자(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 남편, 성종 아버지)가 20세의 나이로 죽고 세조는 피부병(나병)에 시달리게 된다.

현덕왕후는 1441년 단종을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승하, 경기도 안산군에 예장되었다가 1450년 문종 즉위와 함께 현덕왕후로 추승되면서 능호는 소릉이라 명명되었습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으로 개호되었으며, 같은 해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습니다.

그러나 1456년(세조 3년)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아지와 동생 권자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어, 현덕왕후는 추폐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저 물가로 옮기는 수난을 당합니다. 1513년 중종 8년에 복위되어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되고 신주가 종묘에 봉안됩니다.

 

현릉

50년 만에 편안히 눈을 감은 원혼

성종 9년에 포의 남효온이 상소를 올려 "문종이 홀로 제사를 받고 있고 소릉을 폐지한 것은 민심과 천심에 미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추복하시옵소서" 현덕왕후의 추복을 건의한다. 이에 도승지 임사홍과 영의정 정창손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후 연산군 초에 충청도 도사 김일손이 상소하기를 "제왕에는 단독 신주가 없는데 문종 임금만이 홀로 제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소릉은 그의 아들 노산군과 무관한 일입니다. 권씨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오니 당연히 북구되어야 하옵니다"

연산군은 조상의 뜻이라며 묵살한다.

현덕왕후 난간석과 상석

중종 7년 국상의 방식을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격해지고 있을때 검토관 소세양이 소릉을 복구하라고 주장하지만 묵상당했다. 그 다음해 뇌성병력이 종묘 나무를 친 사건이 일어나자 호조판서 장순손이 태묘의 재앙은 문종이 단독 신주라고 주장한다. 이 사건에 놀란 중종은 신하들과 논의 끝에 현덕왕후 권씨의 능을 복구하기로 결정한다. 권씨의 재궁을 양주로 옮겨 문종의 현릉 옆에 소릉을 만들었다. 그리고 중종 11대에 현덕왕후의 부묘제르 지냈다. 비로서 50여년 만에 그녀의 시호와 능이 모두 복구되었다.

후궁출신으로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다시 그 출신의 이유로 어린 아들이 죽고, 친정은 모두 몰락했으며 그리고 자신의 능까지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했던 권씨. 그녀는 50년 만에 자신을 사랑했던 남편 문종 옆에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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