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1 조선왕조실록 여성으로서 처음 국정을 다스리다. 세조비 예종모 정희왕후 윤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8.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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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1 조선왕조실록 여성으로서 처음 국정을 다스리다. 세조비 예종모 정희왕후 윤씨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정희왕후 윤씨_SBS

여성으로서 처음 국정을 다스리다

성종 즉위년 1469년 12월 조선 역사상 최초로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개국후 처음으로 최고권력을 가지고 섭정했던 여성이었다.

정희왕후 윤씨_KBS

언니와 뒤바뀐 운명

윤씨는 11세에 수양대군과 백년가약을 맺어 낙랑대부인으로 봉해짐으로써 왕실의 여인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대군부인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았던 윤씨는 소헌왕후 심씨가 그랬던 것처럼 국모가 될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윤씨의 운명은 시아주버니 문종이 어린 단종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남편 수양대군이 조정의 실력자로 등장함으로써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인 윤씨는 강원도 홍천 지방관아에서 태어났다. 윤씨가 수양의 부인이 된 사연은 이기의 '송와잡설'에 기록되어 있다.

궁궐의 감찰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 집안에 배우자를 찾고자 왔을때 사실은 윤씨가 아닌 언니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궁중에서 나온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자 어머니 이씨(인천 정헌대부 참찬의정부사 이문화의 딸) 뒤에 숨어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띠어 언니보다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알려져 왕실로 시집을 가게 될 만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인이라 하겠다.

성품이 너그럽고 온후한 신천현감 윤번은 자신의 딸이 수양대군과 혼인을 하자 군기판관에서 부정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어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가 중풍으로 사직하였고, 윤씨가 왕비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는 수양대군과의 사이에 첫째 의경세자, 둘째 예종을 두었다. 세조의 후궁으로는 근빈 박씨(선산 박씨) 한 사람만 두었다. 근빈 박씨는 박팽년의 누이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근빈은 덕원군과 창원군을 두었다.

정희왕후 윤씨(1418.11.11~1483.3.30, 66세,태종18년~성종14년) : 아버지는 파평윤씨 판중추부사 윤번이며, 1418년 홍주 관아에서 태어났다. 태종 왕비 원경왕후 민씨와 더불어 여장부로 통했다. 1428년(세종 10년) 진평대군이던 세조와 가례를 올려 낙랑대부인에 책봉되었고, 145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계유정난 당시 음모가 누설되어 손석손등이 만류하였으나 손수 수양에게 갑옷을 입혀 거사를 독려했다. 세조 즉위후 조용히 지내다가 세조가 죽자 어린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예종이 죽자 한명회와 결탁하여 덕종의 차남 성종(13세)을 왕위에 올려 수렴청정을 하였다. 1476년 일선에서 물러난후 일체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후 7년을 더 살다가 1483년 온양의 행궁에서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부인 소혜왕후 한씨-월산대군, 성종 모),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과 함께 있다. 광릉의 원찰은 봉선사로 969년(고려 광종 20년) 법인국사가 창건하였고, 봉선사 대종은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다

윤씨의 남편 수양대군은 정권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성격이 호방하고 다혈질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자 항상 불만에 싸여 있었다. 또한 형 문종과 3살 차이 동생 안평과는 1살 차이로 왕권의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또한 단종이 후궁의 몸에서 낳기 때문에 왕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이 동생 안평대군과 연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려하자 권람(권근 손자), 한명회(한상질 손자)와 함께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고 망설일 때 윤씨는 거사직전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거사를 독려할 만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계유정난

그러한 결단력 덕분에 세조가 죽은후에도 조선 최초의 여성 실권자로서 7년간 조선의 안정을 도모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계유정난 4년후인 1457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윤씨는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조카를 죽이고 동생(안평, 금성)들을 죽이고 김문기등 사육신과 수백명의 신하들을 죽이며 왕위에 오른터라 궁궐안은 항상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윤씨의 어머니 이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맏아들 의경세자 마저 단종모 권씨의 원혼에 시달려 죽자 윤씨는 큰 충격에 빠졌다.

세조의 피부병 또한 좀처럼 낳지 않아 더욱 암담한 처지였다. 이러한 궁궐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일소하고자 사정전에서 양로잔치를 베풀고 세자의 명복을 빌기위해 정인사를 짖고 불공으로 마음을 위로 받았다.

세조 피부병(나병?)_문수보살

예종 시대

세조가 피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한명회 3째딸)는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1년후 죽고 인성대군 또한 5세의 어린나이로 죽고 만다.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는 우의정 청전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후궁으로 있다가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슬하에 제안대군 현과 현숙공주를 두었다.

정치일선에 나선 첫 조치 - 왕의 계승권에 개입하다

예종 다음 왕위는 마땅히 안순왕후 한씨의 아들 제안대군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윤씨는 당시 4세에 불과한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의경세자 둘째인 성종을 맏아들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옹립한다. 이는 물론 한명회의 4째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성종이 11세 때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병조판서 박중선의 딸 박씨와 결혼한 월산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윤씨의 수렴청정을 통해 한명회등 훈구파와 결탁하고 그들의 세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섭정을 시작한 윤씨는 가장 먼저 종친정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종친중 가장 세력이 컸던 세종의 네째 임영대군의 아들 구성군을 귀양보내고, 왕실 종친의 관리등용을 법(경국대전)으로 금지시켰다.

구성군은 문무을 겸비한 인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불과 28세 나이에 영의정이 되어 궁궐에 자주 출입하였다.

젊은 청년인 구성군을 궁녀들이 흠모해 덕중이라는 궁녀가 환관을 통해 구성군에게 서찰을 보내는등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자, 대간들의 뜻에 따라 구성군을 경상도 영해로 귀양보낸다.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은 예술과 풍류로 자신을 낮추고 살아 천수를 누리게 된다.

또한 윤씨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를 신원함으로써 단종의 영혼과 하해하려 하였다. 송씨의 노비를 돌려주고 동생인 송거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윤씨는 불교를 믿었지만 정책적으로 유교를 숭상한 정치가로 불교의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내 염불소 페지,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였다. 또한 고리대금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게에서 235게로 줄이고 각 도에 잠실을 설치해 농잠업을 육성시켰다. 이외에 영안도(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에는 목화밭을 대대적으로 조성했으며, 경상도 전라도에는 뽕나물 종자를 재배하게 하였다.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다

성종이 29세가 되자 윤씨는 수렴청정을 주저하다가, 어느 날 한 상인이 살인죄로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세조가 살아 있을때 써준 글귀로 윤씨가 용서해주려 하자 성종이 만세의 공법이라며 반대하고 나서자, 윤씨는 결단하고 섭정을 그만둔다. 이로서 성종은 영남에서 성장하던 사림파등을 대거 등용하여 훈구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윤씨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대비전에 거처하며, 때때로 온양 온천에 내려가 휴식을 취하고 하였다. 이곳은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피부병을 치료하던 곳을 찾아 샘물을 발견했던 곳에 '주필신정비'를 세운 곳이었다.

광릉

성종 14년(1483년) 온양에 갔던 윤씨는 병이 깊어져 궁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궁(임금이나 왕세자의 관(棺)을 높이어 일컫는 말)은 3개월간 영순군(세종 5째 광평대군 아들)의 집에 안치해 두었다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에 안장하였다. 이 능은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등 중요한 역할을 한 윤씨는 역대 왕비 중에서 상대적으로 행복한 일생을 보낸 여성이었다. 7년간의 과단성 있는 그녀의 섭정은 성종조의 여러 문물제도를 완성시킬 수 있게 한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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