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0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제사, 재산권, 상속, 여성들의 재가 금지조치, 친영례, 자녀균분제도 및 사림 정계진출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7.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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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0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제사, 재산권, 상속, 여성들의 재가 금지조치, 친영례, 자녀균분제도 및 사림 정계진출에 대해 알아봅니다.

상속

조선시대 제사 재산권 상속 - 유교뮨화

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아니 유교가 이 땅에 완전히 뿌리 내리기 전까지만해도 한국에는 형제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윤회봉사(輪回奉事)’이다. 이 때에는 심지어 아들이 없으면 시집 간 딸이 제사를 받들기도 했다. 유교가 뿌리 내리면서 이같은 풍습은 사라지고 제사는 반드시 장남과 종손이 받드는 이른바‘제사권 종손 독점 시대’로 접어들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만해도 부모의 재산 상속은 모든 자식들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자식 범위에는 딸이 포함된다. 그래서 여성은 시집가면서도 재산 상속분 중 자기 몫을 가져갈 수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갖고 있다가 죽을 때 자기가 원하는 자식이나 사람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다. 이같은 재산 상속 풍습 역시 유교가 뿌리 내리면서 사라졌다. 최근까지도‘불균등 분배’가 당연시되었던 재산 상속 방식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확립되었다.

제사_상속

제사권과 상속권이 장남에게 독점 및 집중된 현상은 유교 문화가 여성계에 뿌려 놓은 대표적인 악습 항목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같은 관습을 가능케 했던 것은 유교문화가운데에서도 좀더 구체적으로는 법치보다 덕치와 예치를 중시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원리에 있었다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지적이다.

 

호주제 · 남아선호, 당장 버려야 할 구습

유교사회, 특히 조선시대 사회에서의 통치 단위는 가족이었다. 조선시대는 제사를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의 하나이자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조선왕조 5백 년의 정치사는 철저하게 가부장제 사회질서를 강화한 과정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여성들을 사회전면에서 철저하게 배제한 역사다”라고 잘라 말했다.

 

조선시대에 가족과 국가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을 맺었는가는 항공대 최봉영 교수의 연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최교수는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한 특징으로‘가(家)중심의 가치 체계’를 들었다. 가는 다시 사회 조직으로서 본가 · 외가 · 유가 · 농가 · 국가 등으로 나뉜다. 이 중 핵심은 본가인데, 이는 단순히 가정이나 가문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과 가족, 생업으로서의 가업과 가산, 행위 규범으로서의 가례와 가규, 조교로서의 가통과 가묘, 역사로서의 가보(家譜)와 가승(家乘)을 모두 포괄하는 완결된 구조다. 부부라는 기본 단위로 시작하는 가는 종국적으로는 국가 조직으로까지 연장된다.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조선 시대 국가는 곧‘일반 가정의 확장된 형태’로 나타난다.

혼인제도

가부장 중심 ·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족관은 오늘날에 까지 살아남아 사회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다. 호주제와 남아 선호가 그 중 대표적이다. 한 여성학자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 참여율이 외국에 비해 훨씬 더 떨어지는 점을 예로 들어,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가족주의와 성 차별에 관한 한 한국의 유교는 ‘당장 버려야 할’ 자랑스럽지 못한 유산인 것이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사림 도학운동

체계화되는 유교적 여성관

조선건국 이래 향촌사회에서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사림들이 점차 정계로 진출하면서 훈,척신 세력과 갈등을 빚어내던 시기가 이어졌다. 그 갈등의 결과는 네번의 사화로 나타났으며 그때마다 사림들은 정계에서 쫒겨났다. 이 시기의 왕들은 훈,척신과 사림들의 갈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정권을 잡은 훈,척신들이 입신양명을 위해 유학을 공부했다면, 사림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수양을 위해 공부했다. 유학을 철저하게 사회윤리로 정착시키려던 사림들은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도학운동을 전개하게된다.

결혼식

사림들이 처음 정계에 진출한 것은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을 끝내고 성종이 친정을 하게 된 때였다. 성종은 그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척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고 그들의 주장을 정책에 반영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여성의 재가를 전면 금지시켰다. 개국초에 여성들이 이혼하거나 남편이 사별하면 제가까지 허용했으나 이제는 그것마저 금지된 것이다. 만일 재가를 할 경우 그 자녀가 관직에 등용될 때 제한을 두었고, 심지어 중종에 이르면 친정아버지의 관직까지 박탈하게 하였다.

가혹하게 여성의 재가를 금지시킨 것은 순수한 혈통으로 가계를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과부가 재가를 할 경우 고려나 조선초기에는 자기 자녀를 데리고 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사림파 훈구파

 

전통적인 관습인 남귀여가혼의 혼인제도 역시 친영제로 바꾸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중종은 자신의 가례 때 직접 모범을 보인다고 친영례로 치렀으나, 사림들이 기묘사화로 정계에서 축출되자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 명종에 이르러 겨우 반친영례로 절충되었다.

사림들이 유학이념을 토대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조금씩 하락되어갔다. 그러나 이때도 여전히 왕실을 비롯한 핵심계층에서만 유교적인 질서가 지켜졌으며, 향촌 전반에는 고려의 관습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재가금지도 자녀가 관직에 진출해야 하는 양반집 여성에게만 국한될 뿐 일반 백성들이 지킬 이유는 없었다.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재산상속과 자녀균분제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도장을 가지고 여성들은 직접 재산을 처분하기도 했고, 재산과 관련된 소송도 적극적으로 벌이는 등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조선 여인들의 삶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유교이념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어야 했던 왕실 속 왕비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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