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0 조선왕조실록 중종의 왕비들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24.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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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0 조선왕조실록 중종의 왕비들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단경왕후 신씨(1487.1.14~1557.12.7, 71세) : 단경왕후 신씨는 거창 신씨 익창부원군 좌의정 신수근과 어머니 청원부부인 한은광(부 한충인-인수대비 사촌 오빠)의 딸로 태어났다. 고모는 폐비 신씨(연산군 비), 셋째 외삼촌인 신수영안순왕후 한씨(예종 계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한살어린 진성대군(중종)과 결혼하였고, 중종의 정비로 단 7일간 재위하였다. 중종반정후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후 232년만인 영조때 부모와 함께 복권되었다. 시호는 단경왕후로 능호는 온릉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출처 입력

단경왕후 신씨(1487~1557)

중종이 대군 시절에 맞이한 부인으로, 불행한 삶을 산 여인이다. 거창 신수근의 딸로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따라서 그녀는 연산군의 비 신씨의 질녀가 된다. 때문에 중종반정 이후에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1487년 1월 14일에 태어난 단경왕후 신씨는 1499년 13세의 나이에 진성대군(중종)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7년 동안 진성대군과 부부로 지내다가 1506년에 박원종 등이 거사를 일으켜 중종을 왕으로 세우자 아버지 신수근에 연좌되어 쫒겨났다. 중종이 그녀를 지키려 애썼지만, 반정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지킬수 없었던 것이다.

중종 단경왕후 신씨

그후 친정에서 지내던 그녀는 1515년 장경왕후가 죽자 복위설이 돌기도 했다. 또 중종이 그녀를 사랑했던 만큼 일부 신하들이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길 주장했으나 반대세력의 힘이 강해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1557년 12월 7일에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영조 때에 신원되어 '단경왕후'로 추존되었고 '온릉' 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녀가 궁에서 쫒겨난 후 232년 만의 일이다. 능은 경기동 양주군 장흥면 잉영리에 있다.

장경왕후 윤씨(1491.7.6~1515.3.2, 25세) : 장경왕후는 중종의 후궁이었다가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 여필의 딸로 오빠는 윤임(대윤), 1491년 7월 6일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여덟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인 월산대군(박원종이 외삼촌)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으로 뽑혀 숙의에 책봉되고 이듬해에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그 해 8월 4일에 중궁에 올랐다. 그 후 1511년 효혜공주(부마 김희-김안로 아들)를 낳았고, 1515년 2월에 원자인 호(인종)을 낳았다. 산후병으로 고생하다 엿새 만인 3월 2일 2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에 있으며 능호는 '희릉' 이다.

출처 입력

희릉_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1501.10.22~1565.4.7, 65세졸)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며 파평윤씨 지암의 딸이다. 1501년 10월 22일에 태어났으며, 1517년 17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될 무렵 조정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권력다툼이 치열했다. 나이가 어렸던 그녀는 조정에서 그녀를 지켜줄 정치적 버팀목이 없었고, 그녀가 의지할 곳은 중종과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호(인종)뿐이었다. 원자의 나이가 세살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원자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어 그나마 그녀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문정왕후는 4명의 딸을 낳았고 이어 아들(명종)을 낳자, 당시 세자에 책봉되어 있는 호(인종)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남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소윤)을 앞세워 환(명종)을 왕위에 올리려고 음모를 꾸미지만, 이것이 세자의 외숙 윤임(대윤)을 자극해 두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이른다 대윤(윤임 일파) 과 소윤(윤원형 일파)의 싸움이다.

이 과정에서 문정왕후는 당대의 권신 김안로에 의해 폐위될 위기에까지 가게 되었지만, 김안로의 실각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1544년 11월에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소윤인 윤원형 일파는 밀려나고 윤임 세력이 조정을 장악했다.

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효성이 깊었던 반면에 문정왕후는 표독스럽고 악질적인 구석이 많았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않히기 위해 인종이 세자로 있던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인종의 심사를 긁기도 했다. 세자를 죽이기 위해 동궁에 불을 질렀다는 말도 전해진다.(인종 후궁 귀인정씨가 구함-정철 큰누나)

그런 그녀의 끈질긴 괴롭힘을 이기지 못한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고도 한다. 인종이 죽고 나서 열두 살이었던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녀는 수렴청정을 했는데, 세간에서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여 윤임 일파와 사림들을 제거하고 동생 윤원형을 앞세워 조정을 장악했다. 그 후 8년 동안 여왕으로 군림한 그녀는, 명종이 20살이 되자 편전을 내주고 물러났다.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뒤에도 그녀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승 자리에 있던 윤원형을 통해 막후에서 조정을 움직였고, 환관과 궁녀들을 통해 명종을 감시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명종을 찾아가 요구 조건을 내세우며 담판을 벌이기도 했으며, 명종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뺨을 때리거나 매를 드는 일도 있었다. 막대한 정치 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던 그녀는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을 통해 시전을 장악하고, 시전 상인들로부터 숱한 뇌물을 받아 조정 대신과 수하들을 움직였고, 이로 말미암아 명종의 왕권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해하기도 했다.

명종은 수차례에 걸쳐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문정왕후는 그런 명종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런 지나친 그녀의 집권욕은 명종 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고, 법질서를 해치는 주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승려 보우를 내세워 불교의 중흥을 꾀하기도 했으며, 선교 양종을 부활하고 도첩제와 승과를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이런 불교 중흥책은 사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전국의 유생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명종은 유생들을 등에 업고 신진세력을 등용시키고, 사화로 죽은 많은 선비들의 넋을 위로하며 그녀의 정책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명종을 압박해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곤 했다. 그 때문에 명종은 재위기간 내내 패배감에 사로잡혀 지내야만 했다.

태릉_문정왕후 윤씨(소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소생으로 명종을 비롯한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으며, 능호는 '태릉' 이다.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는 성종때 수렴청정 7년후 정계에서 깨끗히 물러났으나, 중종 계비 문정왕후는 명종때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고 명종재위기간 20년간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태릉(선수촌)이 일반 왕릉보다 크다는 점에서는 측전무후와 같은 급이라 할만하나, 문정왕후 사후 보우가 살해되고 윤원형 정난정등이 자살하는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듯이 권불 10년(20년?) 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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