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2 조선왕조실록 시호의 기원과 시호도감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 순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2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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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2 조선왕조실록 시호의 기원과 시호도감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 순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파주 삼릉_영릉(세종,소헌왕후)_공릉(예종비 장순왕후)_순릉(성종비 공혜왕후)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법흥왕 원년(514년)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 이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기록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호제도가 정비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와 방법은 매우 엄숙하고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정1품, 영의정 겸임), 제조(정,종2품), 도청(정3품), 남청 등을 임명하여 시책을 올리도록 했다.

시호에 쓰인 글자는 정해져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194자 였으나, 글자수가 부족하여 시호를 정하기 어렵게되자 1438년 세종의 명에 의해 집현전에서 107자를 첨가, 그후 모두 301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주 쓴 글자는 문(文), 정(貞), 공(恭), 정(靖), 양(養), 효(孝), 충(忠)등 120자 정도에 불과했다.

지증왕

문(文)의 경우를 살펴보면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 '충심으로 남을 사랑한다', '널리 듣고 많이 본다' 등 15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 가운데 돌아가신 분의 행적에 맞는 글자를 선택, 시호를 올리는 것이다. 성종이 공혜(恭惠)라는 시호의 내린 뜻을 살펴보면 '공(恭)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웃사람을 섬겼다는 의미이고, 혜(惠)는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해서 붙여진 것이다.'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에 모셔져 있다. 언니인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의 공릉 바로 맞은편에 있다. 자매지간에 나란히 왕후가 된 예는 조선 역사를 통해 전무후문한 일이다.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장순왕후 한씨(1445.1.16~1461,12.5, 세종27년~세조7년, 17세) : 아버지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3째딸로 어머니는 고려의 문화시중 민지의 5대 손인 가정대부 한성부윤 민대생<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의 딸 여흥 민씨, 1445년에 태어났다. 1460년 4월 11일에 세자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461년(세조7년) 원손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7세에 죽었다. 1472년 성종에 의해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공릉'이다.

 

<한명회 9남7녀, 여흥민씨(1남, 4녀), 연일정씨(정종화의 딸, 정몽주의 서손녀, 3남), 전주이씨(선천 공조의 딸, 5남 3녀)>, 동생 한명진(권람 동생 권제의 딸과 혼인)

장남 : 낭성군 한보(琅城君 韓堡, 1447년 ~ 1522년)(부인, 한성군 이훈(李塤)의 딸, 6남3녀)

장녀 : 한씨 - 신주(申澍)<고령부원군 신숙주 장남>의 처.

차녀 : 한씨 - 윤반(尹磻)<영천부원군 윤사로와 세종(후궁 상침송씨)의 딸 정현옹주의 장남>의 처. 슬하 2남 5녀.

삼녀 :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년 ~ 1461년) - 예종의 정비(正妃), 인성대군(5세졸)

사녀 :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 ~ 1474년) - 성종의 정비(正妃)

한명회는 먼저 세조의 왕세자였던 예종에게 셋째딸 장순왕후를 출가시켰다. 그러나 다음해 바로 장순왕후는 열일곱의 아까운 나이에 원손을 낳다가 요절하고 만다. 6년 뒤 한명회는 넷째 딸을 예종의 조카 덕종의 아들 자을산군(성종)에게 시집보냈다. 예종에게도 아들(제안대군 4세)이 있고, 자을산군에게도 형(월산군)이 있어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년 뒤 예종이 승하하자 당시 제안대군이 너무 어렸고, 덕종(세조 장남, 성종 부, 추존왕)의 장남인 월산군은 늘 병으로 누워 지냈다. 왕위를 자을산군으로 하는 것은 장인인 한명회와 정희왕후 윤씨의 결탁이 낳은 정치적 산물이었다.

공혜왕후는 12세에 궁에 들어왔는데도 예의가 바르고 덕이 많아 궁내 어른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했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자을산군으로 봉하고 베필을 가리 때에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했다. 1467년 정월 12일에 예를 갖추어 친영할때 영응대군(세종 8남) 이염에게 혼사를 주관하게 하여 예를 이루었다.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했다. 그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임금이 신하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우함>가 날로 더해갔다.'

순릉_공혜왕후

왕비로 책봉되어서는 정희왕후 윤씨, 소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에게 항상 진기하고 맛있는 것을 구해 바치는 등 극진한 효도를 다했다.

후궁들에게도 너그럽고 대범하게 대접했다. 장차 후궁을 뽑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의복을 장만해 두었다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내리고, 그 뒤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의복과 노리개를 끊임없이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왕후가 열여덟 살 나던 해 병이 들어 친정으로 거쳐를 옮겼을 때 성종은 하루 걸러 거둥하여 병색을 살피고 약을 들게 했다. 이 정성 때문인지 병이 차도를 보여 궁으로 돌아왔으나 곧 재발, 다음해 구현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성종과 세분 왕후는 날마다 거둥하여 보살피고 공혜왕후의 쾌유를 종묘사직에 빌었다.

그러나 공혜왕후는 1474년 4월 15일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세 왕후를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승하하니, 성종이 공혜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릉_공혜왕후

공혜왕후의 순릉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왕비의 예를 다해 만들어졌다. 당시의 흐름처럼 병풍석은 생략되었을 뿐 모든 석물제도를 다 갖추고 있다. 소담한 난간석주며 동자석주는 건원릉과 헌릉의 특징을 보여주고 상석의 귀면은 문종의 현릉과 비슷하다.

공혜왕후 한씨(1456.10.11~1474.4.15, 성종5년 19세) : 아버지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4째딸로 어머니는 민대생<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의 딸 여흥 민씨, 1467년 12세의 나이에 한살 어린 자을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몸이 약함. 세조비 정희왕후는 덕종의 장남인 월산대군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으나 한명회의 주장대로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세웠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씨는 146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능은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순릉'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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