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1 조선왕조실록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선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25.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728x90
반응형

연재 041 조선왕조실록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선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선릉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 역은 조선 제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한국종합전시장과 55층짜리 무역센터가 쭉쭉 늘어서 있는 강남구 삼성동에 훼손되지 않고 530여년 전의 왕릉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놀라운 것이다.

사적 제199호로 지정돼 있는 선정릉(宣靖陵)은 지하철 선릉역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도심속의 자연이고 역사이다.

성종과 그 계비 정현왕후(중종 모)를 모신 선릉과 그분들의 아들인 중종이 누워 있는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입구 쪽에 있는 것이 선릉이다.

홍살문과 정자각 건너 멀리 보이는 것이 성종의 능이고 동쪽 언덕에 있는 것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세조의 손자이고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인 성종은 1457년(세조 3년) 7월 30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혜왕후 한씨이다.

성종이 태어난 지 두 달만에 부친(의경세자)이 20세로 요절하자(단종모 현덕왕후 저주?)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비 장순왕후-한명회 딸)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성종은 자을산군으로 봉해진다.

그러나 예종도 즉위한 지 1년 만에 승하하고 예종의 원자는 겨우 아홉 살이었으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도 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세조 비)의 명으로 성종은 1469년 11월 28일 13세의 어린나이에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서화에 능해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선릉_정릉

선릉에 있는 지석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우니 세조가 특별히 사랑했다. 일찍이 형인 월산대군과 더불어 궁중에 있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며 그 자리에서 시인(侍人)에게 벼락이 떨어지자 모두 기절하였는데 왕만 홀로 예사롭게 여기었으므로 세조가 '이 아이는 태조와 비슷하다' 고 했다"

태조의 비범함을 닮았다는 성종은 7년간 정희왕후(할머니)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1476년(성종 7년) 비로소 친정을 시작했다.

왕비인 공혜왕후가 1475년(성종 5년) 승하하자 성종은 원자(연산군)을 낳은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 윤씨는 왕비가 되자 질투가 심해져서 궁내에 많은 물의를 빚었다. 어느 날 성종이 후궁의 침소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가 소동을 부리고,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자 인수대비 한씨(성종 모)의 노여움을 사, 결국 1479년 폐위되고 3년 뒤 사약을 받기에 이른다. 훗날 벌어진 갑자사화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25년 동안 성종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선릉_성종대왕릉

경국대전과 대전속전을 완성하여 통치의 기반을 닦았고, 토지의 세습과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 관수관급제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했다.

또한 경서에 밝고 성리학에 조회가 깊어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케 했다. 또한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조선 초기 조선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적 기반과 체계를 확립한 장본인이 성종이다.

성종은 정비 3명과 후궁 9명을 두었고, 적자적녀 2남 1녀와 서자서녀 14남 11녀를 두었으며,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왕위에 있은 지 25년 보령 38세였다<폐비 윤씨(27세) 사사시키고 얼마살지 못했군요!!! - 자식생산력은 대박>. 1495년 4월 6일 광주부 서면 학당동(현 삼성동) 언덕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강정이라 했다.

'석실이 유해무익하니 원,능은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 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은 만들지 않았으나 병풍석은 여전히 봉분 아랫 부분에 둘러져 있다. 12면의 병풍석에는 각각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했다. 다른 양식들은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중종 모)의 능은 왕릉 동쪽 언덕에 동원이강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이 윤창년으로 왕비중에 특이하게 이름이 알려져 있다. 성종이 항상 "부녀는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법인데 현명한 왕비를 맞아들인 후부터 내 마음이 편해졌다" 고 칭찬했다는 말이 지석에 씌어 있다. 왕비릉은 병풍석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나머지 상설물은 왕릉과 비슷하다.

정현왕후 윤씨(1462.6.25 ~1530.8.22, 68세 ) : 아버지는 파평 윤씨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이며 어머니는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로, 충청도 신창의 관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윤창년. 1473년 12살의 나이로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종2품)에 봉해졌다. 1479년 윤씨가 폐출되자 1480년 11월 8일에 성종의 3번째 왕비에 봉해졌다. 윤씨 폐출에 깊이 관여했고 성종의 윤씨 복위를 인수대비와 함께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세자 융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그녀가 생모인줄 알았다. 그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1494년) 1497년에 자순왕대비에 봉해졌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때 박원종의 의견대로 진성대군(중종)을 즉위 시키는 것을 허락하고, 중종 즉위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의 죽음등에 깊이 관여했다. 1530년(중종25년) 8월 22일 68세의 나이에 경복궁에서 생을 마감했고 석달 후인 10월 29일에 안장됨. 소생으로 신숙공주(1478년생-요절)와 중종(1488년생)이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선릉_정현왕후 능

선릉은 이후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으며, 또한 1625년(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불이나 수리를 했고, 다음해에도 두 번이나 능 위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조실록>에 전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