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8 조선왕조실록 7일의 왕비 인왕산 치마바위 중종비 신수근 딸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16.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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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8 조선왕조실록 7일의 왕비 인왕산 치마바위 중종비 신수근 딸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인왕산 치마바위

역적 가문이므로 왕비에 책봉할 수 없다

중종 1년(1506년) 인왕산으로 두 여인이 올라가고 있다. 앞선이는 남편 중종과 생이별을 한 단경왕후 신씨였고, 그 뒤를 몸종이 따르고 있었다. 신씨는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등 반정공신들에 의해 폐출되고, 인왕산 근처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머물며 경복궁이 잘 내려다 보이는 인왕산 중턱에 다홍치마를 넓게 깔았다. 그러자 경복궁에서 중종이 인왕산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한스럽기만 하였다. 신씨는 조정대신들의 건의로 시전 죽전궁(종로 2가)으로 옮겨졌다. 신씨는 다시 친정으로 거처를 옮겨 고모인 연산군의 아내 신씨와 같이 지낸다. 이후 평생 남편과 재회를 하지 못하고 인왕산 치마바위에 애절한 사랑의 사연만 남기고 71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중종_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1487.1.14~1557.12.7, 71세) : 단경왕후 신씨는 거창 신씨 익창부원군 좌의정 신수근과 어머니 청원부부인 한은광(부 한충인-인수대비 사촌 오빠)의 딸로 태어났다. 고모는 폐비 신씨(연산군 비), 셋째 외삼촌인 신수영안순왕후 한씨(예종 계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한살어린 진성대군(중종)과 결혼하였고, 중종의 정비로 단 7일간 재위하였다. 중종반정후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후 232년만인 영조때 부모와 함께 복권되었다. 시호는 단경왕후로 능호는 온릉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출처 입력

남편 중중의 즉위에 엄습해 오는 불안감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궁궐을 화류장으로 만들고 전국 8도의 미녀들과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채홍준사라는 관직을 두고 지방 사족의 미혼 처녀들을 징발하기 위해 채청녀사를 파견하였다. 전국에서 선발된 여인들은 '운평' 이라 하였으며 이중에서 다시 뽑히면 '흥청' 이라 불렀다.

연산군의 난폭함과 퇴폐는 갈수록 실해졌고, 조정대신들은 반기를 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나선이가 성희안으로 그는 성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정9품), 부수찬(종6품)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이조참판(종2품)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의 관직에 올랐다. 연산군이 양화도로 놀이를 갔을때 성희안이 연산군을 풍자하는 시를 짖자 노한 연산군은 종9품인 부사용의 말단 관직으로 좌천시켰다. 또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신출신인 박원종(월산군 부인 박씨의 동생)을 포섭하였다. 박원종은 성종 23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공조참의(정3품)를 지내다 연산군의 국정운영을 비판하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으며 연산군에 능욕당한 누이 박씨의 자결소식을 듣고 연산군에 앙심을 품고 있던 터였다. 또한 당시 명망가인 유순정을 끌어들여 진성대군을 추대하고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놀러가기로 한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이 낌새를 느꼇는지 유람계획을 취소하고, 호남으로 유배를 갔던 이관, 유빈, 김준손 등이 궐기를 알리는 격문을 돌리자, 더 이상 늦출수 없다고 판단한 세사람은 거사를 단행했다. 먼저 연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을 찾아가 거사에 동참할 것을 종용했으나, 협조하지 않자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거사일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종의 세번

째 계비 자순대비 즉 중종모이자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교지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몇번 사양한 끝에 교지는 내려지고 중종은 사태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신씨와 사저에 있다가 왕으로 추대되고 신씨는 사저에 홀로 남겨진다.

남편과의 생이별, 그리고 그리움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박원종등은 신수근의 딸인 신씨의 폐위를 주장하고 중종은 조강지처를 버릴수 없다며 8일간 버티다 결국 신씨는 폐서인이 되고 만다.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는 자식들이 있어 왕비자리는 보전하였으나, 중종비 신씨는 자손이 없어 쫒겨나고 만다. 신씨는 인왕산 아래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거처하면서 매일 인왕산을 올라 다홍치마를 경복궁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펼친다. 이때 신씨 나이 20세 중종 나이 19세 였다.

남편과 생이별한 지 9년만에 조정에서는 신씨에 대한 복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신씨 복위를 주창하는 사림들

당시 반정공신들인 박원종은 윤임의 외삼촌으로 후궁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무관 윤임의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이며 어머니는 평양부원군 박중선의 딸이었으며, 월산대군의 후처 박씨는 윤임의 이모였다. 윤임은 누이 윤씨는 16세에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중종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니 곧 장경왕후 윤씨이다.

한편 8년 동안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3대신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등이 모구 세상을 떠나자 정계는 두 파로 양분되었다. 잔존 공신세력과 조광조가 이끄는 사림세력이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도학정치에 기반한 강력한 왕권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윤씨는 인종을 낳고 6일만에 산욕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에 중전의 자리를 놓고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 의리를 내세우며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사림세력의 찬성과 반정세력의 반대로 중종은 큰 사안이라며 승정원에 상소문을 두기로 하자, 대사간 이행은 권민수등은 문제를 제기하며 원자가 있기때문에 신씨의 복위는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김정과 박상을 두둔한다. 복위문제는 훈척신들과 사림들간의 팽팽한 대결이 되고 만다. 이때 김안로가 양시론을 주장하여 박상과 김정을 귀양보내고 이행의 벼슬을 박탈하는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한편 조광조를 대표하는 사림세력은 훈척신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심정을 비롯한 76명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심정, 남곤, 홍경주 등이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주초위왕' 사건인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세력을 제거했다.

이에 신씨의 존재는 점점 잊혀지고 궁궐에서 쫒겨난지 50년이 흐른 나이 70세에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어도 나라에서는 아무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친정 조카들이 봉사하라"

명종은 중종의 세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명종은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그녀의 집을 폐비궁으로 승격시키고 비복과 전답을 내렸다. 이것은 아버지 중종의 조강지처 신씨에 대한 예우였다.

 

7일의 왕비_단경왕후

 

다시 전개되는 복위 운동

강산이 12번 변해 1672년(현종 13년) 이조참의(정3품) 이단하가 폐비 신씨의 신주나마 위로해주자고 하였다. 현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신수근의 5대손 신희의 집으로 신주를 옯겨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698년(숙종 24년)에 전 현감 신규가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린다.

숙종은 선왕인 중종이 신씨를 복위시키지 않은 것은 다른 뜻이 있다고 하여 신씨의 별묘만 세우기로 하고 그 논의는 일단락 되었다. 다만 해창위 오태주가 신씨를 기리는 시를 바쳤을 뿐이다.

 

전날 원비로서 지존의 배필이 되었는데

건춘문으로 쫒겨날 때 모두 원통히 여겼네.

불쌍한 그 정상 복위를 원했건만

성심이 있는 곳을 아는 이 없었네.

 

새로이 사당지어 신씨를 모실 때

천추로 내려오도록 변함없어라.

존봉하는 그 마음 그 의기

사실은 증명 안 해도 알 일일세.

오태주(현종의 부마)

온릉_단경왕후

신씨 복위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1739년(영조 15년)으로 유학자 김태남이 누차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자 영조가 경연에 나가서 이 일을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송인명과 호조판서 유척기는 복위 반대의 뜻을 주장하였고, 다른 신하들은 마땅히 복위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두 주장을 점검한 후 복위가 정당하다는 명을 내렸다.

마침내 신씨는 궁궐에서 쫒겨난 지 232년 만에 신원이 되었다. 온릉이라는 능호가 내려졌으며 ,단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온릉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죽어서도 현 삼성동에 있는 중종의 정릉으로 갈 수 없었다. 다만 인왕산의 치마바위만 그녀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음 뿐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조선초 왕족 명문가로 있다가 연산군의 폭정에 동조한 아버지 신수근의 죽음과 함께 폐출되어 232년만에 신원된 비운의 왕비로 1살어린 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후 여러 후궁들을 두었으면서도 정작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를 찾지 않았던 것은 반정공신의 눈치와 신씨 집안세력이 한미해지고 자녀가 없어 복위시 자녀 출산에 따른 궁중의 법도가 흐려질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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