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연산군묘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27.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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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연산군묘에 대해 알아봅니다.

연산군묘는 도봉구 방학동 산 75번지로 현대식 건물인 아파트와 연립주택으로 둘러쌓여 있는 사적 제362호로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재실뒤 언덕으로 나가는 작은 쪽문을 나서서 언덕위로 올라가면 봉분을 두른 담장이 나오고 이 곡장을 돌아 앞으로 가면 폐왕 연산군의 묘와 거창군부인 신씨 묘가 함께 보인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강화 교동도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가 1512년(중종 7년) 12월 12일에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상언하여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인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로 이장했다.

이때 중종은 이장을 윤허하면서 형님인 연산군을 왕자군의 예로 개장토록 하고, 개장할 때 쓸 쌀과 콩 100섬과 면포 150필, 정포 100필, 꿀 2섬, 참기름 2섬, 밀가루 4섬, 황랍 28근을 하사했다. 또한 중종은 이듬해 2월 11일에 연산군의 묘를 수축할 것을 명하고, 양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묘역은 능성 구씨인 사위의 선영으로서 연산군의 딸과 사위도 이곳에 묻혀 있으며, 폐비 신씨도 1537년(중종 32년)에 연산군묘 옆에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연산군 묘의 상설로는 곡장 3면과 상석 2개, 장명등 2개,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과 제각이 있을 뿐이다. 대군의 예우로 했기 때문이다.

연산군 묘_폐비 신씨 묘

연산군은 1476년 11월 6일 성종과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융이며. 1483년 2월 6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성종이 승하하자 1494년 12월 29일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즉위초에는 아직 전조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정도 질서는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조 4대 사화 가운데 1498년의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모두 연산군 재위시절레 일어났다.

즉위 4년이 되던 해인 무오년, 유자광이 "김일손이 기초한 시초 속에 <조의제문>은 세조를 비방하는 대역무도한 것" 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

리자, 사림파의 간언과 권학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했던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에게 능지처참의 형벌을 가하는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하는 옥사를 일의켰다.

연산군_엄소용 정소용

그로부터 6년후 다시 생모 윤씨의 폐위와 죽음을 문제삼아 갑자사화를 일으켜 훈구 부중세력의 재력을 빼았고 자신의 향락과 사치, 부패를 추종하는 궁중세력의 편을 들었다. 생모 윤씨 폐위 당시 부왕의 후궁으로서 폐비 윤씨를 모함했던 엄씨와 정씨를 타살하고 폭정을 꾸짖는 병상의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고 구타하여 치사케 했으며,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등을 사형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이미 죽은 한명회, 정여창 등도 부관참시했다.

두 사화 외에도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했으며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녀의 집합소로 만들고 전국에 채청채흥사를 보내 미녀를 뽑아서 그중 300명을 흥청이라 하여 궁중에서 기거하게 했다.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고 학정을 비방하는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하며 심지어 내연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횡음을 자행했다. 정치는 방기되고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문화의 침체와 인륜질서의 파괴를 가져오는 무수한 실정을 저질렀다.

<연산군일기> 사평에는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단근질하기, 가슴빠개기, 토막토막 자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 운운하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연산군은 마침내 훈구세력이 주도하는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1506년 11월 6일 역질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며 물도 마실 수 없고 눈도 뜨지 못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는 2남 1녀를 낳았고, 후궁 조씨에게서 역시 2남 1녀를 낳았으나, 네 아들 모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연산군이 유배가서 살던 집인 부근당의 터가 지금도 강화도 교동에 남아 있으며 주민들이 화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연산군일기>에서는 연산군이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연년생으로 8명의 자식을 얻었다. 반면 연산군이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은 5남 7녀로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1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고작 3명 많았다.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인데 그 20명의 후궁들 중 정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자식들 중 거창군부인 신씨의 자식들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폐비 신씨(1476.11.29~1537.4.8, 62세) : 폐비 신씨는 거창 신씨 신승선과 어머니 중모현주(中牟縣主) 이씨(李氏-아버지 임영대군)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폐비 신씨를 비롯하여 신씨의 형제들은 각각 왕실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으로, 폐비 신씨의 큰오빠인 신수근인수대비의 당조카와 혼인하였으며, 셋째 오빠인 신수영안순왕후 한씨(예종 계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또한 중종단경왕후 신씨의 고모이며, 성종의 5녀 경순옹주의 남편인 의성위 남치원의 이모이기도 하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에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1488년)되었고 1491년 휘신공주를 낳았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1494년). 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대궐에서 쫒겨나 후궁 처소인 정청궁에 머물다 중종 32년(1537년)에 사망했다. 묘는 양주 도봉산 해촌리에 묻혔으며, 현재 서울 도봉구 방학동연산군묘로 이전되었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은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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