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4 조선왕조실록 중종 치세와 정릉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2024. 4. 29.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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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4 조선왕조실록 중종 치세와 정릉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정릉_중종

성종과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을 뒤로 하고 제법 동산의 모양새를 갖춘 언덕을 하나 넘어야 정릉에 닿을수 있다. 선릉은 중종과 정현왕후의 아들 중종의 능이다. 아들이 죽어 부모님 곁으로 모셔진 것이다. 그럼 3명의 비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 중종비인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 딸로 복위후 온릉<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19, 사적210호, 비공개, 순조7년>에 모셔졌고, 계비이자 인종 모인 장경왕후 윤씨(대윤)는 희릉<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7-1, 서삼릉중 하나, 사적200호>, 세번째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소윤)는 태릉<노원구 공릉동 산223-19, 태강릉중 하나, 사적201호>에 모셔져 있다.

서삼릉

서삼릉 : 西三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양시의 조선왕릉이자 사적 제200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 왕조의 왕릉 희릉(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 효릉(인종, 인성왕후 박씨), 예릉(철종, 철인왕후 김씨)이 조성되면서 3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폐비 윤씨 회묘, 소현세자 소경원, 장조아들 의소세손 의령원, 정조아들 문효세자 효창원, 고종 2남 의천왕묘 등이 있다. 왕자 및 공주묘와 태실이 있으나 농협 산하의 젖소개량소 부지 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공개 권역이었다. 다만, 2023년 9월 8일부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게 되었다. 하지만 2023년 10월 21일부터 가축 전염병 방지 문제로 인하여 다시 비공개 권역으로 전환되었다.

태강릉

태강릉 : 泰康陵

태릉(泰陵)은 중종 계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의 능이고, 강릉(康陵)은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두 능을 아울러 태강릉(泰康陵)이라고도 한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1488년(성종 19년) 3월 5일 태어난 중종은 1494년 4월 6일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추대 조선 11대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신진사림파인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신진사류를 중요직에 대거 등용하여 유교적 도덕정치를 이상으로 했다.

그러나 이런 신진 사림 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이들의 생각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읽은 남곤, 심정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 문제를 계기로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고 주장하며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이로서 신진 사림세력은 숙청당하고 훈구파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개혁 정치는 쇄퇴하고 훈구파들간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 각종 옥사들이 줄지어 발생했다.

1521년(중종 16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제거되고, 윤세창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 으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서인이 되어 쫒겨가는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해졌다.

1531년(중종 26년) 김안로의 집권으로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이에 대립하여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등장하여 정국은 훈신과 척신의 대립으로 치달았다.

삼포왜란

이러한 불안은 국방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522년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전라도 왜변 등 남부지방 해안들이 끊임없이 일본에게 시달렸다. 임진왜란의 전초전 성격이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야인들도 빈번히 침략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지방에서는 향약이 전국화되는 등 유교주의적 향촌질서가 자리잡혔던 것이다.

또한 중종의 오랜 재위 기간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중종 11년) 설치한 주자도감에서 많은 동활자를 주조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속동문선> <사서통해> 등의 문헌들을 편찬 간행했다.

경제적으로는 저화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치적 혼란과 잦은 왜침으로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릉_중종

중종은 세 왕비와 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중종이 병으로 승하한 것은 1544년 11월 15일 창경궁에서 였다. 보령 57세 왕위에 오른지 39년 만이다.

이듬해 2월 3일 중종은 현재 서삼릉 능역내 장경왕후 희릉 오른쪽에 있다가 그로부터 7년 후 1562년(명종 17년) 9월 4일 명종의 모후로 정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여 지금의 삼성동 자리로 옮겼다.

이유는 풍수적으로 불길한 자리라는 이유였으나, 문정왕후가 후일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종의 능을 옮겼으나 강물이 들어 보토하는 등 비용을 낭비하고, 임진왜란때 재궁이 불태워지는등 득은 없고 해만 있는 천장이었다. 이런 결과로 부부였던 중종,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모두 따로 모셔져 있음은 아이러니 하다 할 것이다.

정릉_중종

정릉의 상설형식은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되 선릉(성종비 중종 모친 정현왕후) 양식을 답습하여 병풍석과 구름 무늬와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다. 상설물은 곡장 3면, 병풍석 12면, 난간석 12간, 상석 1, 장명등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양 2쌍, 석호 2쌍,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 1, 홍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은사_삼성동

 

원찰은 보우가 주지로 있었던 봉은사이다. 본래 이 절은 794년(신라 원성왕 10년)에 녹화국사가 창건하여 견성사라고 했는데, 1498년(연산군 4년)에 중창하여 봉은사라 개칭한 것이다.

봉은사

<출처 - 문화유산 왕릉, 왕릉 기행으로 엮은 조선왕조사. 한국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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