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5 조선왕조실록 7일의 왕비 인왕산 치마바위 중종비 신수근 딸 단경왕후 신씨의 온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30.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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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5 조선왕조실록 7일의 왕비 인왕산 치마바위 중종비 신수근 딸 단경왕후 신씨의 온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온릉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이다. 사적 210호인 온릉이 비공개 능이라서인지 근처 마을 사람들도 능 이름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작은 철문을 지나 숲으로 조금 걸어들어가면 관리사무소로 쓰고 있는 재실이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재실을 지나면 홍살문과 정자각이 왼쪽으로 보인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단경왕후온릉' 이라고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807년(순조 7년)에 세운 것이다.

온릉은 해좌사향(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의 언덕 위에 있으며,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도 없이 석양 석호 각 1쌍이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하나와 망주석 1쌍, 가운데에 사각 장명등 1개, 문인석과 석마 각 1쌍을 양쪽에 각각 배치했으며, 능 아래에 수라청, 망료위 등이 있다. 역대 왕 중 능을 조영하는 산역 공사가 많았던 숙종, 영조 때의 양식을 엿보게 한다. 온릉은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의 단릉이다. 왕비의 능이 이처럼 간소하게 조영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단경왕후 신씨(1487.1.14~1557.12.7, 71세) : 단경왕후 신씨는 거창 신씨 익창부원군 좌의정 신수근과 어머니 청원부부인 한은광(부 한충인-인수대비 사촌 오빠)의 딸로 태어났다. 고모는 폐비 신씨(연산군 비), 셋째 외삼촌인 신수영안순왕후 한씨(예종 계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한살어린 진성대군(중종)과 결혼하였고, 중종의 정비로 단 7일간 재위하였다. 중종반정후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후 232년만인 영조때 부모와 함께 복권되었다. 시호는 단경왕후로 능호는 온릉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단경왕후는 1487년(성종 18년) 1월 14일, 연산군 재위시에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성종 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의손녀이기도 하다. 본관은 거창이며, 1499년(연산군 5년) 13세 때 진성대군과 혼례를 올렸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는 좌의정 신수근의 누이이고, 그의 딸은 반정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이었던 것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을 받드는 궁금세력이었고 중종은 신수근의 사위였다.

때는 1506년, 연산군 12년의 일이었다.

"대감,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합니까?"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 뿐입니다."

우의정 강구손이 던진 질문에 좌의정 신수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한 답변이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훈구파의 박원종이 강구손을 통해 비밀리에 신수근의 마음을 떠본 것이다.

신수근은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 고 하여 반정세력에게 죽음을 당하고 누이와 딸은 모두 폐비가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중종_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는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1506년 9월 2일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9월 9일 왕비로 책봉된 지 7일이 지나, 지중추부사 박원종, 전 이조참판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등 반정의 주체세력이 왕비가 죄인의 딸이므로 왕비로서 부당하다고 하자, 중종은 처음에는 "조강지처를 어찌 내친단 말인가" 라며 망설이다가 공신들의 압력이 계속되자 폐위를 결정하고 말았다. 이에 왕비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쫒겨났다가 후에 할아버지 신승선의 집으로 옮겼다.

반정세력에 의한 신씨 폐위는 후세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후일의 인종)을 낳고 승하하자,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이 중종에게 복위상소를 올렸으나, 대사헌 권민수 대사간 이행 등이 이를 사악한 의논이라고 아뢰어서 실패하고 만다. 실록에 의하면 중종 스스로도 신씨 복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미 그때는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폐비 신씨는 1557년(명종 12년) 12월 7일 사저에서 춘주 71세로 후사없이 승하하여 본가 선영에 묻혔다. 명종은 장생전 관목을 내려 1등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고 신수근의 손자 신사원의 집에서 봉사하게 했다.

온릉_단경왕후

이후 1698년(숙종 24년)에 현감이었던 신규가 상소문을 올려 노산군의 복위와 더불어 폐비 신씨도 왕비로 추복하기를 청했으나 의론이 일치하지 않았다. 숙종은 연경궁 옛터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제수는 봉상시에서 마련하도록 했다.

전날 원비로서 지존의 배필이 되었는데

건춘문으로 쫒겨날 때 모두 원통히 여겼네.

불쌍한 그 정상 복위를 원했건만

성심이 있는 곳을 아는 이 없었네.

 

새로이 사당지어 신씨를 모실 때

천추로 내려오도록 변함없어라.

존봉하는 그 마음 그 의기

사실은 증명 안 해도 알 일일세.

오태주(현종의 부마)

그러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비로소 폐위후 232년 만에 복위되었다. 시호는 단경, 능호는 온릉이라 했으며, 단종의 능인 장릉의 예에 준하여 상설을 새로 만들어 설치했다.

죽어서도 현 삼성동에 있는 중종의 정릉으로 갈 수 없었다. 다만 인왕산의 치마바위만 그녀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음 뿐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조선초 왕족 명문가로 있다가 연산군의 폭정에 동조한 아버지 신수근의 죽음과 함께 폐출되어 232년만에 신원된 비운의 왕비로 1살어린 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후 여러 후궁들을 두었으면서도 정작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를 찾지 않았던 것은 반정공신의 눈치와 신씨 집안세력이 한미해지고 자녀가 없어 복위시 자녀 출산에 따른 궁중의 법도가 흐려질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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