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6 조선왕조실록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 서삼릉 희릉과 효혜공주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2024. 5. 1.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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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6 조선왕조실록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 서삼릉 희릉과 효혜공주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희릉_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서삼릉 : 西三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양시의 조선왕릉이자 사적 제200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 왕조의 왕릉 희릉(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 효릉(인종, 인성왕후 박씨), 예릉(철종, 철인왕후 김씨)이 조성되면서 3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폐비 윤씨 회묘, 소현세자 소경원, 장조아들 의소세손 의령원, 정조아들 문효세자 효창원, 고종 2남 의천왕묘 등이 있다. 왕자 및 공주묘와 태실이 있으나 농협 산하의 젖소개량소 부지 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공개 권역이었다. 다만, 2023년 9월 8일부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게 되었다. 하지만 2023년 10월 21일부터 가축 전염병 방지 문제로 인하여 다시 비공개 권역으로 전환되었다.

서삼릉

서삼릉은 사적 제200호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7-1번지로 희릉(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 효릉(인종, 인성왕후 박씨), 예릉(철종, 철인왕후 김씨), 폐비 윤씨 회묘(회릉), 소현세자 소경원, 장조아들 의소세손 의령원, 정조아들 문효세자 효창원, 고종 2남 의천왕묘, 왕자 및 공주묘와 태실 등이 분포해있다.

서삼릉의 역사를 보면 제일 처음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인종 모)의 능인 희릉이 조성되었고, 그후 중종의 정릉이 조성되어 한때 이 능역에 있었다. 정릉은 1562년(명종 17년)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서울 삼성동으로 천장되었다.

그리고 인종과 그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이 조성되었고, 이후 1864년(고종 1년)에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울 서쪽의 '서삼릉' 이라는능칭을 얻게 되었다. 또한 6만 6천평에 이르는 서삼릉 능역에는 왕실 묘지가 조성되어 회묘, 소경원, 의령원, 효창원, 태묘, 태실등이 있다.

일제는 태실의 형태를 구 중앙청처럼 일(日)자 형태로 만들고 태실 묘석 높이도 3m에서 1m로 대폭 축소하여 민족정기 말살을 시도했으며, 서삼릉을 신사참배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본래의 형태를 훼손해 공원화했다. 게다가 서삼릉으로 통합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태실을 파헤치면서 임금의 태를 보관했던 이조백자, 도자기 등 각종 문화재를 모두 빼돌렸다고 한다.

장경왕후 윤씨(1491.7.6~1515.3.2, 25세) : 장경왕후는 중종의 후궁이었다가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 여필의 딸로 오빠는 윤임(대윤), 1491년 7월 6일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여덟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인 월산대군(박원종이 외삼촌)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으로 뽑혀 숙의에 책봉되고 이듬해에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그 해 8월 4일에 중궁에 올랐다. 그 후 1511년 효혜공주(부마 김희-김안로 아들)를 낳았고, 1515년 2월에 원자인 호(인종)을 낳았다. 산후병으로 고생하다 엿새 만인 3월 2일 2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에 있으며 능호는 '희릉' 이다.

출처 입력

장경왕후는 1491년(성종 22년) 7월 6일 영돈영부사 윤여필의 딸로 호현방 사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8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종모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박원종 누이)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궁중에 들어가 처음에 숙의(종2품)에 봉해지고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어 쫒겨나자 다음해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에 원자(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승하하니 때는 3월 2일 춘추 25세였다.

효혜공주_연성위 김희

효혜공주(孝惠公主, 1511.5.18 ~ 1531.4.20)

이름은 옥하(玉荷)이며 1511년(중종 6년) 5월 18일, 중종(中宗)과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인종의 누나이다.

1515년(중종 10년)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성종의 후궁인 귀인 남씨와,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에 의해 양육되었다.

1520년(중종 15년) 12월 14일,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며 다음해인 1521년(중종 16년) 11월 길례를 올렸다. 중종은 성종이 혜숙옹주를 시집보낼 때 혜숙옹주의 시아버지 신종호를 불러 옹주를 부탁한 것처럼, 공주의 시아버지가 될 김안로를 불러 공주를 잘 대해줄 것을 분부하였다.

1528년(중종 23년), 효혜공주는 이질을 앓았는데 중종이 이를 걱정해 대간의 반대를 부릅쓰고 문병하였다.

1531년(중종 26년) 4월 20일, 딸 선옥(善玉)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그해 윤6월 15일, 고양에 있는 월산대군묘의 좌측 언덕에 예장되었다.

효혜공주는의 딸 선옥(善玉)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尹百源)에게 출가하였다. 윤백원은 명종대에 이량 일파에 가담하여 사림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었으나 효혜공주의 하나뿐인 사위라는 이유로 문정왕후가 언서를 내려 가까운 곳으로 옮기게 했다.

처음에는 태종의 능인 헌릉 옆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22년 후인 1537년(중종 32년) 9월 9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그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곁에 정해져 왕의 능호를 쓰다가, 1562년 중종의 능이 지금의 삼성동 선릉 옆 정릉으로 옮기게 되면서 다시 희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희릉이 옮기게 된 내력으로 이조판서 김안로는 아들 희가 중종과 장경왕후의 적장녀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가 되자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 영의정 남곤, 심정, 대사간 이항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와 재기용되자 동궁(인종-처남)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하고 정적들을 축출한는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키는데 왕릉 천장도 그 사건 중의 하나였다.

중종 32년 김안로는 정광필, 남곤 등에게 중죄를 주려고 희릉 광저에 큰 돌이 깔린 채 그대로 공사를 감행했다는 설을 들어 천장론을 주장했으나, 왕이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풍수지리설상 큰 돌이 광저에 깔리면 불길하다고 아뢰어서 드디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능역 조성당시 총호사이던 정광필 이하 상지관 및 공사에 관계했던 관리들이 대역죄를 지은 것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거나 추탈되어 그들의 자손까지 옥에 갇히는 변이 일어나고 능은 새로이 길지를 찾아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문에는 다음과 같이 왕후를 기리고 있다.

"왕후는 총혜자유한 천성을 타고났고 인효와 더불어 살고 예순과 함께 자라났다. 이미 덕이 후하고 또 공경함을 독실히 하여 성왕의 중흥정치의 복조를 협찬했는데 거의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지만 시보할 것을 아끼어 세상에 계신지 겨우 춘추 25세 만에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이치인가? 그것이 천명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천명이 이렇게도 가혹하고 잔인한가! 아, 애통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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