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7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측전무후를 꿈꾸다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 태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5. 2.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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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7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측전무후를 꿈꾸다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 태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태릉_문정왕후 윤씨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번지에 위치한 태강릉은 사적 제201호로 지정된 문화유적지이다. '태강릉'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은 '태릉'이고 그녀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심온의 6대손) 의 능이 '강릉'이다. 태릉 선수촌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다.

태릉에 잠들어 있는 문정왕후 윤씨(1501.10.22~1565.4.7, 65세졸)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며 연돈영부사 파평윤씨 윤지암의 딸이다. 1501년 10월 22일에 태어났으며, 1517년 17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의 사이에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마지막으로 명종을 낳았다.

태릉_문정왕후 윤씨

문정왕후는 어려서부터 정정단일(貞靜端一)하고 효경자혜(孝敬慈惠)하며 총명함이 매우 뛰어났으며 평소 검소하여 사치함을 좋아하지 않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했다고 한다.

중종의 제 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1515년(중종 10년) 2월에 세자(인종)을 낳은 뒤 그 산후병으로 승하하자 문정왕후가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명종)을 낳자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세자의 외숙인 윤임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세자를 폐위하고 경원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모의를 하므로 김안로와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이로써 1543년(중종 38년)에는 윤임 일파의 대윤,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라 불리는 외척간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중종 가계도

명종 가계도

1544년 11월에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 일파가 득세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권은 문정왕후에게 넘어갔다.

인종의 뒤를 이어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 동안 동생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한 결과, 대윤을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이 윤임과 그 일파인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등과 그 배경을 이루는 사림파를 배제하기 위하여 정치적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평소 문정왕후의 환심을 얻고 있던 첩 정난정을 통해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윤임이 임금(인종)의 병환이 위중할 때에 장차 제 몸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의 아우(명종)을 추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림군(윤임의 외조카)을 내세우려 했는데 유관과 유인숙도 이에 협력했다"라고 무고함으로써 대윤 임파는 역모죄로 몰려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계림군 이유(桂林君 李瑠, 1502년 ~ 1545년)는 조선의 왕족으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인 계성군(성종의 둘째 아들, 숙의 허씨 1남)에게 입적되었다. 을사사화 때 계림군의 외숙부인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고변으로 인해 강원도 안변으로 도피하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윤임의 외조카이며, 인종에게는 6촌 형이자 외가로는 이종사촌 형이 된다. 계성군의 양자가 되면서 인종에게는 부계로도 이복 사촌 형이 되었다.

 

이러한 을사사화 이후에도 양재역벽서사건이라는 정치적 옥사를 일으켜 대윤의 남은 인물들을 도태시켜 버렸다. 양재역벽서사건이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 이라는 내용으로 익명의 벽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에 윤원형 일파는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여 많은 사람을 처벌했다.

문정왕후는 재상이었던 정만종을 통해 당대의 고승 보우를 알게 되어 불교의 부흥을 도모하기도 했다. 보우는 15세에 출가한 후 금강산 일대에서 수련하여 수양력이 탁월했으며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 대해서도 지식이 뛰어난 고승이었다. 문정왕후는 유명한 유학자들과 깊이 사귀고 있던 고승 보우를 깊이 신뢰하여 봉은사 주지로 가게 했다.

태릉_문정왕후 윤씨

그리고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절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자를 처벌하고, 조선시대 처음으로 봉은사와 봉선사에 방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550년 12월 15일 선교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를 내리게 하여 다음해 양종을 부활하고 도승시를 실시하여 승려들의 도첩제도를 다시 부활시켰다.

문정왕후는 평소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고 한다.

"석교(釋敎) 는 곧 이단이니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다만 조종조 이래로 아주 끊어 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유독 폐하랴. 내가 이 일 때문에 주상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나 이 또한 내가 나라를 위하는 성의의 일단이다"

문정왕후는 지금의 서삼릉(희릉 옆)에 있는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 곁으로 천장하여 자신도 그 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보토에 거액의 경비만 쏟아붓고 말았다.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년)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여 현재의 태릉에 장사지내니 중종의 곁에 함께 묻히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태릉_정자각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척신 윤원형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에 은거하다가 죽고, 보우는 유생들의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거듭된 상소에 따라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보우는 후일 억불정책의 시대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훗날 임진왜란때 휴정 유정(사명당) 등 승병들이 활약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태릉의 정자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 말끔하게 단장해 놓았다. 단청을 한 정자각에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정전이 있고, 배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 하부에는 주초석으로부터 약 70cm 높이까지 백분칠이 되어 있다. 임좌병향(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의 문정왕후의 능에는 봉분에 운채와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을 두르고, 봉토를 받쳐주는 만석 중간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조각하여 십이지신상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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