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48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편찬경위 및 인종의 생애와 치세 인종비 인성왕후 박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5. 3.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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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48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편찬경위 및 인종의 생애와 치세 인종비 인성왕후 박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편찬 경위

'인종실록'은 총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44년 11월부터 1545년 7월까지 9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종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을사사화로 인해 그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희생과 탄압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인종실록>은 편찬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46년 <중종실록> 편찬에 부수되어 4년 후에야 겨우 완성을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들 모두가 <중종실록>의 편찬자들입니다. 또한 즉위년 11~12월의 기사가 <종종실록>에 실려 있어 <인종실록>에는 7개월 동안의 역사만 실려 있습니다.

인종 가계도

인종의 생애와 치세(1515.2.25~1545.7.1, 재위기간 1544.11.~1545. 7. 9개월)

인종은 중종의 큰아들로 정현왕후 윤씨의 소생으로, 1515년 2월 25일경복궁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호' 이며 자는 '천윤' 입니다. 1520년에 여섯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고, 그 후로 25년 동안을 세자로 머물다가 1544년 11월에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원인 모름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545년 7월 1일 왕위에 오른지 불과 8개월 보름 만에 후사 없이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효릉_정자각

성품이 너그럽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금욕적인 생활로 전형적인 선비의 면모를 갖춘 임금이었습니다. 또 형제 간의 우애도 깊었고, 여덟 살에 성균관에 입학할 정도로 총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너그러움은 표독스러운 문정왕후의 도리에 어긋나는 악을 내버려 두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로 인해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습니다. 명나라 에서는 시호를 '영정' 이라 했고, 조선에서는 묘호를 '인종' 이라 했습니다. 그 외에 여러 시호와 존호가 추가되어 정식 묘호는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료대왕' 입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약구 원당에 마련되었고, 능호는 효릉 입니다. 인종은 1명의 정비와 2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자녀는 없었습니다.

효릉_인종_인성왕후 박씨

인성왕후 박씨(1514.7.6~1577.3.2, 25세) : 나주박씨 박용의 딸이며, 1514년에 태어나 1524년 10월 1일 열한 살의 나이로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고, 1544년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인종이 죽은후 32년을 더 살다가 1577년 11월 29일,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소생은 없다. 능은 '효릉' 이며, 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효릉 개방_23.9.7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미개방 능으로 남아있던 서삼릉 효릉(孝陵)이 드디어 55년간 닫혔던 빗장을 활짝 열었다. 7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주관으로 진행된 고유제(告由祭)를 시작으로 효릉이 개방됨으로써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조선왕릉 전체가 관람객의 발길을 맞게 됐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후속 조건이었던 ‘조선왕릉 40기 전체 개방’ 약속도 14년 만에 비로소 실현됐다.

 

효릉은 조선 제12대 왕인 인종(재위 1544∼1545)과 인성왕후의 무덤이다.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철종(재위 1849∼1863)과 철인왕후를 모신 예릉(睿陵)과 함께 고양 서삼릉을 구성하고 있으며, 왕릉의 원형이 잘 보존된 능으로 평가받는다.

출처 : 고양신문(http://www.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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