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51 조선왕조실록 양재역 벽서사건의 송인수와 부안기녀 산홍, 조선 3당시인(三唐詩人)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사랑이야기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2024. 5. 14.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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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51 조선왕조실록 양재역 벽서사건의 송인수와 부안기녀 산홍, 조선 3당시인(三唐詩人)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사랑이야기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대윤 윤임(인종의 외숙)과 소윤 윤원형(명종의 외숙)의 한판 대결은 문정왕후가 배후에 있는 소윤의 한판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양재역 벽서사건'을 허위로 꾸며서 정적을 대숙청했다. 이것은 윤임과 사림들의 잔당을 대숙청하기 위한 일대 사기극 이었다.

벽서의 내용은 이렇다.

'여왕(문정왕후)은 위에서 누르고 간신 '이기'는 아래서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이기는 윤원형의 오른팔인 심복이었다. 오누이간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벽서사건으로 봉성군(중종 희빈홍씨 2남)과 송인수, 이약빙, 임형수 등을 사형시켰고 권발, 이언적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이때의 송인수에 대해서 알아보자.

전라 감사시절 송인수는 숨은 학자를 찾아다니며 담소를 즐겼다. 특히 남평 현감 유희춘(최부의 외손자), 무장 현감 백인걸과 마음이 통했다. 송인수는 글만 좋아하는 딱딱한 선비만은 아니고 풍류도 있었다. 부안의 기녀 '산홍'이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해를 거듭하며 풍류를 즐겼다. 전라 감사를 마치고 떠나는 길에 두 현감과 산홍이가 여산까지 따라와서 전송을 했다.

송인수가 부안 기생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자네가 영리해서 좋아 하지만 이불 속의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만약에 한 이불 속에서 뒹굴면 사랑에 취해 내가 죽을 것만 같았네."

기생의 입에서 재치 있는 답이 흘러나왔다.

"저기에 있는 무덤들을 보시오. 모두 제 남편들의 무덤이오."

이 소리를 들은 두 현감은 박장대소 했다.

기녀의 눈에는 눈물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송인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홍랑_최경창

이처럼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사랑은 최경창과 경원 기생 홍랑의 사랑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최경창이 함경도 경원 현감에서 물러나 고향인 한양에서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홍랑은 즉일로 경원을 떠나서 7일 동안 걸어서 한양 땅을 밟았다. 불철주야 사모했던 님을 만났지만 시 한 수를 남기로 병석을 기웃거리다 떠났다. 기생의 신분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악법에 몸서리 쳤다.

묏버들 가지 꺽어 임에게 보내오니

님이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 잎이 돋거든 홍랑이라 여기소서

홍랑 - 대표시(최경창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함)

버들가지 꺾어서 천 리 먼 곳 임에게 보내니(折楊柳寄與千里人)

나를 위해 시험 삼아 뜰 앞에 심어 두고 보세요(爲我試向庭前種)

행여 하룻밤 지나 새잎 돋아나면 아세요(須知一夜新生葉)

초췌하고 수심 어린 눈썹은 첩의 몸인 줄을(憔悴愁眉是妾身)

최경창 ‘번방곡(飜方曲)’ - 홍랑시 한역

고죽의 시는 까다로운 수사나 난해한 고사를 배제한,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정서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하고 있으며 음감의 조절에 의한 인간의 낭만적 정감을 밀도있게 표현하고 있다.

또 시의 흥취를 숭상하며, 인생의 애상과 감개를 노래하는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잘 나타냈다.

이 가운데에서도 우암 송시열의 평가 ‘청고지절(淸苦之節)’처럼 타협하거나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품이 작품 곳곳에 서려있다.

요약하면 고죽의 시는 시어가 간결하고 리듬이 산뜻하며 시구의 조탁(彫琢)이 뛰어나다. 특히 선정후경(先情後景)이 뚜렷하며 풍자가 돋보인다.

소설가 조수웅

홍랑은 고죽 최경창(崔慶昌1539~1583, 영암 출생)이 문과에 급제 후,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 후 그를 알게 되어 사랑이 싹터 그녀는 일생을 자기의 모든 것을 고죽에게 바친 정말 '순애보'의 주인공이다. 홍랑이 진정으로 사랑한 최경창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가운(嘉運)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이며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는데, 시가 청절(淸切)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일컬어졌으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한양을 떠날 때(玉頰雙啼出鳳城)

새벽 꾀꼬리 저렇게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曉鶯千爲離情)

비단옷에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羅衫寶馬河關外)

풀빛 아득한 가운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草色送獨行)

최경창 '송별(送別)' - 병간호를 마치고 떠나는 홍랑에게 쓴 시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相看脈脈贈幽蘭)

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莫唱咸關舊時曲)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至今雲雨暗靑山)

최경창 - 홍랑과 이별시

 

<감흥(感興)>

​약초 캐 먹으면 오래 산다는데(採藥求長生)

나는 어찌해야 하나(何如孤竹子)

서산의 고사리 캐어먹고(一食西山薇)

맑은 바람 속에 사는 게 불사약이네(淸風猶不死)

 

<고묘(古墓)>

옛 무덤에 제사 지내는 사람 없고(古墓無人祭)

소와 양이 밟아 길이 났네(牛羊踏成道)

해마다 들판에 불을 지르니(年年野火燒)

무덤 위에는 풀도 없구나(墓上無餘草)

 

<스님에게(寄僧)>

가을 산에 사람은 병들어 누워 있고(秋山人臥病)

산길에는 낙엽만 수북이 덮였네(落葉覆行逕)

문득 서쪽 암자의 스님을 생각하니(忽憶西菴僧)

멀리서 풍경 소리 들려오네(遙聞日暮磬)

최경창 대표시


상 최경창 부부 합장묘_하 홍랑 묘

 

홍랑이 죽자 해주최씨 문중은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시신은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홍랑과 최경창 사이에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한다.

​1969년에는 해주최씨 문중이 그녀의 묘 앞에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웠다.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홍랑(洪娘)은 선묘(宣廟) 관북인(關北人)으로 기적(妓籍)에 올라 행적(行蹟) 밝혀 전(傳)하는 바 없으나 출상(出象)한 재화(才華)로서 선조(先祖) 고죽최공(孤竹崔公) 휘(諱) 경창(慶昌)의 풍류반려(風流伴侶)로 기록되어 있고, 그의 절창(絶唱)인 시조 1수가 오직 청아(淸雅)와 정숙(貞淑)을 담아 주옥(珠玉)으로 전(傳)할 따름이라. 공이 북평사(北評事) 퇴임하실 제 낭(娘)이 석별(惜別)하여 바친 글월을 한역(漢譯)하여 번방곡(飜方曲)을 읊으시니 격조 높은 쌍벽(雙璧)으로 세전(世傳)하여 홍랑(洪娘)의 문명(文名) 시사(詩史)에 빛나니라. <중략>

고죽공(孤竹公) 관북(關北)에 유(留)하실 새 낭(娘)은 막하(幕下)에서 조석으로 모시었고, 환경(還京) 3년 후 요환(療患)하신다는 전언(傳言) 듣고 범계(犯界)하여 불원천리(不遠千里) 7일 만에 상경(上京) 시양(侍養)했다 하며, 후일(後日) 공이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재위(在位) 중 경성(鏡城) 객관(客館)에서 돌아가시매 영구(靈柩) 따라 상경(上京)하여 공근시묘(恭謹侍墓)하니 지순고절(至純孤節) 인품(人品)을 가(可)히 알리라.’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해주최씨 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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