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54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시설 의적 홍길동(洪吉同)과 홍일동(洪逸童) 엄귀손(嚴貴孫) 허균의 홍길동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2024. 5. 24.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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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54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시설 의적 홍길동(洪吉同)과 홍일동(洪逸童) 엄귀손(嚴貴孫) 허균의 홍길동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홍길동은 조선시대 허균이 쓴 <홍길동전>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른면 홍길동은 실존인물로 전라남도 장성군 아곡리 남양 홍씨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 에는 홍길동이 태어난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집터에는 축대가 남아있고 대나무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다. 대나무는 홍길동이 적의 접근을 곤란하게 하고, 다급한 일이 생기면 그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기 위해 심어 놓은 것이라 한다.

홍길동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 10여건이 남아 있는데 한결같이 홍길동을 강도 또는 도적의 괴수로 표현하고 있다. '홍길동은 당상관 행세를 하며 대낮에도 무기를 가지고 관아를 다나들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는 홍길동이 잡히고 14년이 지난 뒤에도 그를 따르던 무리 중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농민들이 많아서 세금을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 홍길동은 충청도 지역의 대규모 도적단 우두머리로 대낮에도 거침없이 관아에 들어가 도적행위를 했으며 지방의 수령들은 그런 홍길동을 모두 두려워했다고 한다.

홍길동이 활약했던 시기는 연산군이 왕위에 있을때로 폭군인 연산군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아 살 길이 막막해진 유민들이 산적이 되었고 가장 큰 세력이 홍길동이었다.

현종 때 홍만종이 쓴 <해동이적>에는 '홍길동은 홍일동의 동생으로 장성 아차곡에 살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홍일동은 세조때 호조참판까지 지낸 인물로서 한 끼에 찐닭 2마리와 국수 3주발 등 무려 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다는 기록이 성종 때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 남아 있을 정도로 대식가 였다.

또 우리나라 유명 인물들을 성씨로 모아 놓은 <만성대동보>에 의하면 대식가 홍일동과 도술로 유명한 서자 홍길동응 태종 때 경성절제사를 지냈던 홍상직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과 장성군에 전해 내려오는 몇 가지 전설들을 모아 보면 홍길동의 출생지는 전라남도 장성군 아치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홍길동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홍상직의 집안인 남양 홍씨 족보에는 아들로 홍일동만 기록되어 있을 뿐 홍길동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는 사대부 중심사회로 서자인 홍길동은 족보에 오르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_홍길동 10건

또한 실록에 남아 있는 홍길동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당상관(정3품 이상) 엄귀손이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엄귀손은 세조때 '이시애의 난' 을 진압한 무관으로 홍길동을 도와주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엄귀손은 홍길동에 동조한 무리로 산업의 경영을 도와주었고, 홍길동이 훔친 물건을 숨겨 주는 등 여러가지 동조적인 역할을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엄귀손이 홍길동과 손을 잡은 이유는 조선전기 무관에 대한 푸대접과 부정한 관리를 혼내주고 신분 차별에 대한 갈등을 없애려 했던 홍길동과 뜻을 같이 했을것으로 생각된다. 엄귀손은 결국 홍길동을 도와준 사실이 밝혀져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옥중에서 최후를 맞는다.

조정과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엄귀손이 당시 도적의 무리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홍길동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의지가 이들의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은 홍길동을 일개 도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반역이나 역모를 다스리는 의금부에서 다뤄졌다는 점이다.

연산군 6년 1500년에 강도 홍길동이 잡혔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후 어떤 처벌이 내려졌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중종 18년에 순석이라는 큰 도적단을 처리하면서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홍길동의 옥사를 거울삼아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 때 황윤석이 쓴 <증보해동이적>에는 '홍길동이 해외로 도망가 왕이 되었을 것' 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후 100년 뒤에 쓰여진 허균위 소설 <홍길동전>에는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활빈당을 만들어 의적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율도국으로 가서 왕이 된다는 내용으로 그려져 있다.

허균은 왜 소설 <홍길동전>을 썼을까?

소설 <홍길동전>의 지은이 허균은 당대 뛰어난 문장가인 허엽의 아들이자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의 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800여편의 시문을 남겼다. 그 중 대표작이 바로 <홍길동전>이다.

허균은 선조 41년에 공주 목사로 있었다. 공주은 홍길동 산성을 비롯해 홍길동의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저해 내려오는 곳이다.

허균은 공주 목사로 있는 동안 서자들과 자주 어울렸다는 이유로 파직당했을 만큼 서자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균은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피신하고 그 곳에 애일당을 짓고 글을 쓰는데 전념했다.

이 애일당 뒷산 이름이 교산으로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했다. 허균은 이 곳에서 <홍길동전>의 기본사상이 되는 백성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호민론'과 사람은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유재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이처럼 허균은 당시 부패한 조선 사회와 그 속에서 억압받던 백성들의 아픔에 대해 느꼈던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홍길동전>을 썼으며 그 소설 주인공 홍길동과 100년전 실재 홍길동은 '의적'으로 후세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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