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56 조선왕조실록 1530년대 중종시절 조선 팔도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2024. 5. 27.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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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56 조선왕조실록 1530년대 중종시절 조선 팔도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신증新增’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새로 증보’하였다는 의미이다. 1478년(성종 9) 양성지에 의해 제작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에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우리나라 문인들의 시문을 첨가하여 1481년(성종 12) 노사신(盧思愼), 양성지(梁誠之), 강희맹(姜希孟)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하였다.

 

 
강희맹(1424~1483) : 본관 진주,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 1375?~1418)의 딸이다. 어머니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동생이었으므로, 세종은 강희맹의 이모부가 되며, 세조와는 이종사촌이 된다. 강희안(1418~1464)의 동생이며, 부인은 순흥안씨 안숭효의 딸로 연산군을 사가에서 키움. 저서로는  《금양잡록》, 《촌담해이》 《사숙재집-서거정 편찬》 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본 상태로 보존되었는데, 현재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1486년(성종 17) 김종직 등에 의해 1차 수찬본修撰本이 완성되었고, 1499년 (연산군 5) 성현·임사홍 등에 의해 2차 수찬본이 완성되었다. 1528년(중종 23) 이행·홍언필 등이 착수한 3차 수찬본은 1530년(중종 25)에 ‘신증’이라는 두 글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 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왕조실록>의 일부인 <세종실록지리지>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의 지리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리지이며 지도를 덧붙인 최초의 지리지였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중종 34년에 내용을 첨가하여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뿐이며 그것도 광해군 때 다시 인쇄된 1부만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금의 경기, 충청등 조선 8도의 부, 목, 군, 현 329개 지역을 각각 26개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고을의 역사는 물론, 그 지역 사람들의 특성인 풍속과 성씨, 그리고 그 고장이 배출한 역대의 인물과 관청, 나아가 정자와 여관 사찰에 이르기까지 1531년경 조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외에도 각 지역과 관련된 역대 문인들의 글까지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_팔도총서(독도 표기)

1530년대 조선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한양이 처음 도읍지로 정해진 것은 백제 근초고왕 때였다고 한다. 그 뒤 한양은 통일신라 시대에는 한양군으로, 고려때는 남경으로 이름이 바꾸었다가 조선 태조 3년에 다시 도읍지로 정해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고을이 변천하여 내려온 내력과 풍속에 앞서 각 고을의 위치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당시 한양의 모습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한양은 둘레 9975보, 즉 약 18km가 되는 경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으로는 각종 궁궐과 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농단-먼저 농사를 짓는다.' 이라는 곳이 있어 매년 1월이 되면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고 모범을 보였으며, 자신이 추수한 쌀로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소고기국밥을 주었던 것이 설렁탕으로 유래된 것이다. 왕이 '선농단'에서 농사를 지을 때 왕비는 '선잠단'에서 손수 누에를 쳐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소방서가 있었는데 서울 종루옆에 '수성금화사'라는 소방서가 있어 각종 소화기구가 갖추어져 있고, 멸화군이라는 소방대원 50여 명이 24시간 대기 근무를 했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궁궐의 장례 물품과 절차를 담당하던 '귀후서'라는 부서도 기록되어 있는데 '귀후서'는 백성들에게 싼값으로 관을 만들어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_경도 상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전국 팔도중 충주호와 월악산이 전국 제일로 치고 충주를 신선이 사는곳으로 비유해 놓았다. 물록 충주의 물길은 조선시대의 운수 교통로로 이용되어 경상도와 충청도의 세금이 모두 이 물길을 따라 한양의 마포나루, 광나루로 실어 보내졌는데 그 거리가 뱃길로 260리였다고 한다.

또한 지금의 구미는 조선시대 선비의 고장으로 고려 3은(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의 한사람인 야은 길재가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선비들은 사림이라는 정계에 진출한다.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도는 다른 지방에선 나지 않는 특산물이 25가지나 기록되어 있다. 소뿔 술잔과 귤이 의뜸이었는데 귤은 대궐에서도 아주 귀한 음식으로 감귤을 실은 배가 한양에 도착하면 왕이 친히 나가서 맞이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노사신은 머리말에 '여지승람을 펼쳐 보면 위로는 한양에서 아래로는 각 지방에 이르기까지 가로세로 수천리의 지역을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자세히 볼수 있으며, 위아래 몇백 년의 사적이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다' 라고 적어 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최초의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중요하게 다룬 각 지방의 인구와 군사의 수, 토지 면적과 토산품 등 군사, 경제적인 항목들이 빠져 있는 대신 풍속과 인물, 시와 문장 등이 주요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국 사신들에게 보여 줄 것을 염두에 두고 대외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군사, 경제적인 부분은 빼고 편찬했기 때문이다. 대신 역대 문인들의 시문을 풍부하게 실음으로써 조선 왕조의 높은 문화수준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세세한 기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유실된 능묘의 복구에도 참고가 되었으며, 숙종 때에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로도 쓰였다. <동국여승람>을 편찬한 노사신은 '이 책을 편찬함이 어찌 오늘 한때 선비들의 총명함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겠는가? 이책으로 훗날 우리의 자손들이 나라의 넓은 것과 왕의 덕이 멀리 미친 것을 의심치 않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옛 선조들의 혜안을 어찌 지금의 우리가 깨우치겠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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