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60 조선왕조실록 계유년의 피바람, 잔인한 시절, 나는 김시습이다 중에서 알아봅니다.

2024. 6. 4.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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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60 조선왕조실록 계유년의 피바람, 잔인한 시절, 나는 김시습이다 중에서 알아봅니다.

<계유년의 피바람>

마침내 그해 시월 십일(1453.10.10.) 조선 왕조를 세운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인 계유사화가 일어났다. 변란을 일으킨 수양 측에서는 그 일을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한다는 의미에서 계유정난이라 일컬었으나, 그것은 분명 수양이 어린 임금의 왕위를 빼앗으려고 조정 대신과 선비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사화였다.

오래 전부터 왕좌를 노려 온 수양대군은 모사꾼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과 치밀하게 계획을 짠 후에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등 세종, 문종 때의 원로대신들을 무참히 죽였다. 사실 이렇다 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기에 일단 모두 죽인 뒤에 역모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런 다음 그들의 식솔들중 남자는 다 죽이고, 여자는 노비로 삼았으며 집과 재산은 사화에 가담한 자들에게 몽땅 나누워 주었다. 또한 죽은 대신들과 뜻이 같았던 수양대군보다 1살 어린 친동생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을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고는 곧 바로 사약을 내려 죽였다. 계유사화로 수많은 아까운 대신들과 인재들이 비명에 죽어 갔다. 이때 김문기 선생은 사직상소 하였으나, 마침 이징옥의 난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이 난을 평정(平定)할 수 있는 사람은 함경도의 민심을 얻은 김문기 선생뿐이라 하여 선생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로 임명하였다.<2품 이상, 1453.10.25.>

사화 바로 다음날부터 조정은 수양의 천하가 되었다. 수양은 병권을 장악하여 스스로 뭇 재상의 으뜸인 영의정 자리에 올랐고, 이름만 왕의 신하인 영의정이지 사실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조정의 중요한 자리는 수양 일파가 죄다 차지하여 우리 어린신 전하(단종)는 망망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섬 같은 처지였다.

영릉(세종)께서 꿈꾸셨던 인의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불의와 살육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무도한 세상이 되어갔다. 수양의 입버릇처럼 주공이 된다고 하던 빈말을 믿어야 할 것인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는(김시습 화자)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는 것 같아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방문을 박차고 나와 절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뒷마당에서 불목하니<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가 장작을 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떼쓰다시피 그에게서 도끼를 빼앗아 대신 장작을 팼다. 처음에는 어설펐으나 그동안 무예로 단련해 온 덕분인지 이내 장작이 제대로 쪼개졌다. 힘주어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소원을 외치고 또 외쳤다.

‘비록 수양이 권력을 움켜쥐고 위협하고 있다고 해도 하늘의 도우심으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지켜 나가게 해 주십시오. 하여 어린 임금이 성군이 되고 제가 벼슬길로 나아가 영릉께서 꿈꾸셨던 인의의 세상,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유학의 이상향을 만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어린 시절부터 꾸었던 그 꿈을 꼭 이루게 해 주십시오’

늦가을 오후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도끼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때론 분노를 담아서 때론 희망을 담아서……

<잔인한 시절>

수양과 그 일파에게는 어린 임금의 총명함과 침착함이 눈엣가시였다. 날이 갈수록 임금은 점점 자랄태고 그러다 빼앗긴 권력을 되찾을 만큼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하루라도 빨리 왕위를 양위 받아야 했다. 게다가 백성들 사이에서는 수양대군이 머지않아 임금을 몰아낼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어 민심이 몹시 들끓었다.

나는 김시습이다저자강숙인출판여름산발매2013.01.15.

 

수양은 일단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임금의 반대에도 강제로 국혼을 추진하여,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했다. 그런데도 민심이 가라않지 않자 임금이 직접 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숙부인 수양은 주공과 같은 사람이니 백성들은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임금이 열다섯살 되던 그 다음해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수양은 금성대군과 혜빈양씨, 정종(단종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 등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멀리 유배를 보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과 가장 친한 숙부였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는 어머니를 잃은 어린 세손을 젖먹이로 길로 준 은인이었다.

결국 어린 임금은 수양의 위협에 못 이겨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앉고 말았다.(단종 3년 1455.윤6.15)

상왕의 양위 소식은 이내 나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도 그 소식이 날아왔다. 해가 하늘을 불살라 버릴 듯 뜨겁게 이글거리던 윤유월 중순 어느날의 일이었다. “영릉 전하! 신은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와락 통곡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같은 통곡을 쏟아 내며 애달프게 울었다. 그 날부터 사흘 동안 나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기도 하고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기도 했다. 사흘이 지난후 그동안 애지중지하고 읽고 공부하던 책들과 그동안 지었던 시가 적힌 종이며 문집들을 마당 한가운데 던져 놓고 불쏘시게로 불을 붙였다.

수락산과 김시습

나는 우두커니 서서 너울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타고 있던 것은 단순히 책과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꿈이고 미래였다. 그 미래는 불꽃이 사그라지는 순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떤 꿈도 꿀 수 없을 터였다. 그것으로 나는 내 꿈을 빛나는 미래를 포기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일부러 뒷간에 빠져 온몸에 오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마음속으로 노래하듯 주문을 외었다.

김시습 자화상 찬

 

‘출사에 대한 미련 따위 깨끗이 버렸다. 저 뒷간에다 몽땅 버렸다. 버리니까 좋구나. 가벼워서 좋다. 날아갈 듯 가벼워 훨훨!’

 

◆ 김시습 연대기(1435~1493) *김시습 본인 기술과 이이의 김시습전 인용

·1435(세종 17) 본관 강릉, 서울 성균관 북쪽 빈궁리에서 김일성(음보, 충순위)과 선사 장씨 사이에서 태어남. 신라 김알지 후손인 원성왕의 아우 김주원의 후손임. 증조부 김윤주(안주목사), 조부 김겸간(오위부장). 조은(釣隱) 최치운(강릉, 이조참판)이 시습(時習)이라 이름 지어줌.

·1437(3) 시구를 짓기 시작했으며, <정속(正俗)> <유학(幼學)> <소학(小學)> 배움

·1439(5) : 수찬(3) 이계전(1450.7.6. 문종 때 도승지) <문종 당시 김종서 좌찬성, 정찬손 좌부승지, 김문기 우부승지> 문하에서 <중용> <대학> 배움. 만취당 사예(4) 조수(趙修-문하에 서거정 등이 있음)에게 열경(悅卿)이란 자를 받음. 정승 허조(許稠)에게 시를 짓다(老木開花心不老).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도승지(3) 박이창에게 시험케 함. 세종이 오세(五歲)라 함. 비단 50 필 하사함. 그 뒤 13세까지 대사성(3) 김반에게서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춘추>를 배우고, 겸사성(2품 이상) 윤상(尹祥, 호 별동, 정몽주 문인, 김종직 아버지 김숙자에게 주역을 가르침)에게 <주역> <예기>를 배우다. 제자백가는 스스로 터득함.

·1449(15)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가 돌봐줌, 3년 시묘살이 하던 중 외할머니 돌아가심. 아버지 병환으로 계모 들임.

·1452(18)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며 준상인(설준? 홍준?)에게 불교를 배움. 서울에 올라와 안신(安信), 지달하, 정유의, 장강, 정사주와 과거 공부하며 형제처럼 지냄. 훈련원 도정(3) 남효례의 딸과 혼례. 어려서부터 영화를 누리고 출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친척과 이웃이 지나치게 칭찬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함.

·1453(단종 원년, 19) 봄에 과거에 낙방하고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함.

·1455(세조 원년, 21) 세종(영릉,英陵,1550.2.17.), 문종(현릉,顯陵, 1552.5.14.)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자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됨. 설잠(雪岑)

·1456(22)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함.

·1458(24) 봄에 세조가 동학사에 사육신의 초혼각을 세우자 여름에 동학사로 가서 조상치등과 함께 단종을 제사 지냄. 관서 유람 후 <유관서록>을 엮음.

·1459(25) 관동지방 유람. 겨울에 화암사에서 <원각경> 읽음. 고승 해사에게서 불경 강해를 들음.

·1460(26) 다시 관동 오대산을 유람하고, 강릉에 두세 달 머묾. 9월에 <유관동록>을 엮고 10월부터 호서를 거쳐 호남을 유람함.

·1461(27) 호남 유람, 전라도 진원현 묘월 정사와 가성사에서 겨울을 남.

·1462(28) 호남 유람을 마치고,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정착함.

·1463(29) 가을에 <유호남록>을 엮음. 책을 사러 서울로 왔다가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내불당에 머물며 <묘법연화경> 언해에 참여함.

·1465(31) 경주로 가서 용장사 부근에 금오 산실을 짓고 정착. 3월에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여해 세조로부터 도첩을 받음. 4월에 서거정을 만나 글을 주고받았으며, 도봉산 근처에서 여름을 지냄. 가을에 경주 금오산으로 돌아옴.

·1468(34, 세조 졸) <금오신화> 완성됨, <선거집구> 시구 100수 지음.

·1472(성종 3, 38) 서울 성동 수락산 부근에 임시 거처, 현인을 등용한다는 소식에 벼슬하고 자 육경을 다시 공부함.

·1473(39) 문도 선행과 함께 수락산에 폭천정사에 살며 농사지음. 봄에 <유금오록>을 엮음.

·1475(41) 5월에 정업원에서 이틀 밤을 묵으며 불경을 가르치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다. 일연 사상을 이어받아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지음.

·1480(46) 생육신 남효온과 서신을 주고받다.

·1481(47) 봄에 환속하여 조부와 부친의 제사를 지내고 안 씨와 혼인함. 일 년 남짓 지나 사별한 듯함. 남효온이 머무는 봉선사에 가서 함께 즐김.

·1483(49) 폐비 윤씨 사건 발생. 두타(頭陀)의 모습으로 관동으로 떠남. 춘천 청평사에 머물다 홍천, 인제로 옮김.

·1485(51) 강릉에 머물다가 한때 옥에 갇혀 시 <강릉 옥벽에 쓰다>를 지음. 양양 바닷가의 낙진촌에 머물다.

·1486(52) 설악 쪽으로 들어가 검달동에 정착해 농사를 짓다.

·1487(53) 양양부사 류자한이 술과 음식을 보내오자 편지를 보내며 가깝게 지냄. 류자한이 여인(계집종)을 보냈지만 떠남. 벼슬을 권했지만 사양함. <괴애 김수온(신미 동생), 사가 서거정, 금헌 김유> - 옛 친구

·1491(57) 봄에 중흥사에 머무름. 남효온과 김일손이 찾아와 백운대와 도봉산을 유람함. 10월 김일손이 소릉(단종 생모 현덕왕후) 복위 상소문 올림.

·1493(59) 부여 무량사에 머물며 <묘법연화경>에 발문을 씀. 3월에 병으로 사망.

·1495(연산군 원년) 무량사 스님들이 매월당의 시신을 화장하고, 사리를 수습해서 부도를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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