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7 한문소설의 대가 연암 박지원 허생전, 우상전 7 허생이라는 선비가 장사로 돈을 벌어 도둑떼를 구휼하고 이상적 사회를 시범적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2024. 1. 16.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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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 한문소설의 대가 연암 박지원 허생전, 우상전 7 허생이라는 선비가 장사로 돈을 벌어 도둑떼를 구휼하고 이상적 사회를 시범적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허생은 무기력한 서생으로 장사로 재물을 축적하여 이상국을 건설합니다. 현실 정치의 담당 능력과 북벌에 대한 뚜렷한 명분의식은 소유하고 있으나 경제적으로 충분한 자본과 정치적으로 확실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불우한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허생은 재물 이나 권세 앞에서도 당당하며, 아무하고나 결탁하지 않고 자기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제휴를 맺는 소신 있는 인물의 전형입니다.

변씨는 부만 추구하는 양식이 없는 부자가 아닌, 허생의 비범함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시대의 추이를 파악하는 정지적 감각도 갖추고 있습니다. 재야의 인재 발굴에도 관심을 가지는 근대적인 의식을 소유한 자본가의 표상입니다.

이완은 어영대장으로 외형상 당대의 북벌정책을 주도해 나가는 데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북벌에 대한 뚜렷한 명분의식을 지닌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허생이 제기한 세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자신있게 대답을 못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현실정치의 담당 능력이 없는 무능과 폐쇄성의 극치를 보이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군도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돈이 없어 땅과 부인을 갖지 못하고 도둑의 길을 걷게 된 사람들입니다. 곧 집권층의 무능과 정책 부재의 현실속에서 희생당하는 민중들입니다.

허생전은 열하일기 권10 <옥갑야화>에 삽화 형식으로 실려있는 한문 단편소설입니다. 연암은 허생 뒤에 붙여 쓴다를 통해 "허생은 명나라 유민이라며 경상감사로 부임하는 조계원(1592~1670, 형조판서 역임, 척화파 김상헌 옹호)과 태학사 손승종(1563~1638, 명 병부상서, 태부, 청군 공격으로 전가족 사망)의 부하로 추정되는 어느 중과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1744년~1760년 사이의 한양도

허생이 이완에게 제시한 시사삼책 혹은 시사삼란이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제1책은 '인재 등용의 중요성' 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문벌과 당색으로 결정되던 종래의 타성을 지양하고 적재 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는 적극적인 수용 태도를 요청한 것으로 삼고초려를 인용합니다.

제2책은 '새로운 정치 질서의 기반 촉구' 입니다. 이를 위해 당시 명나라에서 망명해 온 정객들을 위해 국혼을 주고 권문 세가와 왕의 인척들의 재산을 나누어 주자고 합니다. 이것은 북벌이 명분에 치우쳐 있음을 비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3책은 '현실주의적 외교관' 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재를 뽑아 청국에 보내 변발을 하고 되놈의 옷을 입혀 빈공과에 응시하고, 서민들은 강남에 보내 장사치로 스며들어 그들의 허실을 엿보고 호걸과 교제를 맺어 천하를 도모해야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을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완이 대답하기를 사대부들이 모두 예법을 지키고자 변발과 되놈옷을 거부할 것이라 하자, 허생은 지금 사대부들이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상투 하나를 아끼고 넓은 소매하나 고치지 못한다며 이완을 칼로 베어버리려고 하자 이완은 깜짝 놀라 뒷 들창으로 도망갑니다. 어찌 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박지원 선생의 해학은 따라갈 작가가 없는 듯 합니다.

참고할 작품 우상전

우상의 이름은 상조인데 일찍이 자기의 화상에다 자기의 성인 이(李)와 호를 넣은 시를 지은 바가 있었다. 1763년 일본의 관백이 새로이 정권을 잡아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주기를 청하자 우상이 역관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상은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쳐 그곳 지식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우상은 역관이었기에 국내에서는 그의 명성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대부들도 그를 전혀 몰랐으나 하루아침에 그의 이름이 해외 만리의 먼 나라에 떨쳐지게 된 것이다. 나는 우상을 만난 적은 없었으나 우상은 자주 사람을 통하여 새로 지은 시를 보여주고는 하였다. 대체 선비란 자기를 알아주는 이에게는 뜻을 펼칠 수 있겠지만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사름들에게는 뜻을 펴지 못하는 법이다. 우상은 병이 들어 장차 죽으려 하자 후세에 자신의 문장을 알려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며 모든 초고들을 불태워 버린 뒤 27세의 짧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연암은 방문각외전 머리말에 "아름다운 우상은 옛 문장을 힘써 지었다. 옛 예법을 잃으면 야인에게서라도 찾는 법이니, 그의 목숨은 짧지만 이름은 길이 전할 것이다. 그래서 <우상전>을 지었다" 고 하여 벗과의 신의, 인재등용의 문제 그리고 양반사회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상 이언진은 연암보다 3살 어렸으며 연암에게 자기 시를 보이며 평해달라 했으나 연암은 오농세타라 하여 낮게 평하였다. 그후 우상이 요절하니 우상을 못 만난것이 한스럽다 했다.

미야세 류몬(宮瀨龍門)의 《동사여담》(東槎餘談)에 실린 이언진의 초상화

불그레한 닭벼슬은 갓처럼 높다랗고
늘어진 소 멱미레는 전대처럼 벌름거리네
이거야 집 안에서 늘 보던 것이니
하나도 기이할 게 없건마는
크게 놀랍고도 괴이하구나
낙타의 우뚝 솟은 저 등마루는
우상 이언진

 

 

<호질> 이나 <허생전>은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과 참된 삶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방문각외전>의 작품들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1780년 이후에 써진 호질이나 허생전은 이전 작품과 달리 세월이 흘러 사회문제는 구체화 되었고, 비판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 졌으며, 문학적으로는 세련된 장치를 구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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