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1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편찬경위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2.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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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1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편찬경위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단종 정순왕후 송씨

문종실록 편찬 경위

'단종실록'은 총 14권으로 1452년 5월부터 1455년 윤6월까지 단종 재위기간 3년 2개월 동안의 각 방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종실록' 원명은 '노산군 일기'로 표지에는 <단종대왕실록>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의 각 면에는 모두 '노산군 일기' 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종이 상왕으로 밀려나 다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또 다시 서인으로 전락했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종실록'에 대해서는 1455년 8월 29일에 '춘추관의 건의에 따라 노산군 즉위 이후의 시정기를 편찬하기로 하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과정이나 참여 인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1464년 10월 14일에 세조가 <정난일기>의 편찬을 명했을 때 ,그 내용이 '노산군 일기'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단종_장릉01

그 뒤 1469년(예종 1년)에 왕이 춘추관에 명해 노산군 때의 일기와 계유정난 때의 사초를 들이게 하여 그 범례를 살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노산군 일기'의 편찬 작업이 마루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노산군 일기'에는 즉위전 수양대군을 세조라고 부르고 있어, 세조가 죽은 뒤에 작성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노산군 일기'의 구성은 대부분 실록과 비슷하나 서술 방식은 맨 앞쪽에 왕의 출생과 즉위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적었고, 즉위 뒤의 사건은 실록의 기재 방식에 따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실록들이 편찬자의 명단을 부록에 달아 주는데 이 또한 없습니다. 그 대신 숙종때 만든 부록이 붙어 있습니다.

단종이 복위된 것은 1698년으로 숙종 24년 11월의 일이고 '단종실록'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이 이때인데, 숙종 때 붙인 부록에는 이 경위가 적혀 있습니다. '노산군 일기'는 1473년(성종 4년)에 역대의 실록을 인쇄할 때 처음으로 인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뒤 1603년(선조 36년)에 여러 실록을 함께 필사했는데 이때 '노산군 일기'도 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단종 가계도

단종의 생애와 치세(1441.7.23~1457.10.21 재위기간 1452.5.~1455.윤6. 3년 2개월)

단종은 문종의 장남이며 현덕왕후 권씨의 소생으로, 1441년(세종 23년) 7월 23일에 동궁의 자선당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홍위입니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 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해 7월에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단종_장릉02

1452년 5월 14일에 문종이 죽자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는 명석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났지만, 너무 어린 탓에 제대로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미성년인 왕이 즉위했을때, 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습니다. 세종은 18명의 왕자가 있었으며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숙들이 왕위를 노렸고, 한편에서는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이 왕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사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양대군과 고명대신이 서로 대립하여 힘겨루기를 하는 사태로 치닫고, 급기야 수양대군이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등 반대파를 살해하는 계유정난이 발생합니다.

수양은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정인지를 영의정에 한확(덕종비 소혜왕후 한씨 아버지, 사돈관계)을 우의정에 임명합니다.

영월 관풍헌

이후 수양대군의 협박과 회유를 이기지 못한 단종은 1455년 윤6월 11일에 세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사육신(김문기, 이개, 성삼문, 박팽년등) 사건이 발생하고, 1457년 6월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쫒겨나게 되고, 금표비를 세워 동서 300척, 남북 490척'으로 활동을 제한합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이 경상도 순흥에서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옥사가 일어나고,

이보흠(?~1457년, 세조3년) : 세종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정7품 ), 성균관 주부(종6품)를 지냈다.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주는 사창제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 실시한 그를 문종이 아꼈다. 세조 즉위후 순흥(경북 영주)부사로 있던 그는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하려다 발각, 박천으로 유배된 뒤 10월에 죽음을 당했다. 정조때 복권되어 이조판서로 추증.

 

1457년 여름에 홍수가 나자 단종은 영월 객사였던 관풍헌으로 거쳐를 옮겨 청령포보다는 자유로웠습니다. 그때의 외로움과 한스러움을 표현한 시가 남아 있습니다.

영월 관풍헌 정자 자규루

닭 밝은 밤 두견새 울 적에

시름 못 잊어 주 머리에 기대앉았어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 마오.

단종 이홍위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바다 잠들려 해도 잠을 못 이루는데

어느 때 되어야 이 한이 다할까.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골짜기에 지는 봄꽃이 붉구나.

하늘도 저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젖은 내 귀에는 잘 들리는가.

단종 이홍위

세조의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왔으며 복득이란 자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니 1457년 10월 21일에 17세의 나이로 단종은 영월에서 유배 4개월 만에 생을 마감합니다. 죽은 단종은 동강에 버려져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위험을 무릅쓰고 세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업고 영월 엄씨의 선산에 장사지낸후, 계룡산 동학사에서 3년상을 지냈으나 후한이 두려워 일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그후 59년후인 1516년(중종 11년) 12월 15일 노산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게 했다. 1580년(선조 13년) 강원감사 정철의 장계로 묘역을 수축하고 상석과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81년(숙종 7년) 7월 21일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고, 1698년(숙종 24년)에 복위되어 단종이라는 묘호가 올려집니다. 여기에 여러 시호와 존호가 추가되었는데, 정식 칭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입니다.

능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고 능호는 장릉입니다. 봉릉함에 있어 상설은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은 왕명으로 가장 간단하며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1791년(정조 15년) 왕명으로 장릉 밑에 배식단을 설치하여 충신들을 배향했습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부인은 정비 1명뿐이었으며 자손은 없었습니다.

정순왕후 송씨(1440~1521.6.4, 82세,세종22년~중종16년) : 아버지는 여산 송씨 영돈녕부사 송현수이며, 15세인 1454년 1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후에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송현수도 그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순왕후는 1455년 7월에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으며, 1457년 6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을 때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1521년에 서인의 신분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82세 였다.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이 복위되어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되고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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