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2 조선왕조실록 비운의 왕비 단종의 정순왕후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3. 06:01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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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2 조선왕조실록 비운의 왕비 단종의 정순왕후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니다.​

단종 정순왕후 송씨

운명은 명을 나르는 것이다.

운명의 화살은 앞에서 날아오고

숙명의 화살은 뒤에서 날아온다.

그래서 운명은 피할 수 있어도

숙명은 피할 수가 없다.

 

조선왕조 500년의 수 많은 왕후와 후궁들 중에서 가장 한많은 여인을 꼽으라면 우선 단종비가 떠오른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은 남양주군 진건면 사릉리에 있어서 '사릉'이라 한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단종비 송씨)는 82세로 최장수를 기록했다. 이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는 열일곱에 청상과부가 되어 동대문 밖 창신동 산비탈에서 도토리묵 및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숙명이다.

정순왕후 송씨(1440.1.28~1521.6.4, 82세,세종22년~중종16년) : 아버지는 여산 송씨 영돈녕부사 송현수이며, 15세인 1454년 1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후에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송현수도 그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순왕후는 1455년 7월에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으며, 1457년 6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을 때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1521년에 서인의 신분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82세 였다.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이 복위되어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되고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다.

단종비 정순왕후 사릉

1440년(세종 22년) 여산 송씨인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1453년(단종 1년) 간택되어, 1454년 1월에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10일 임술 4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세조가 효령 대군 이보·영응 대군 이염 등과 모여서 송현수의 딸을 비로 할 것 등을 정하여 아뢰다

세조(世祖)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좌의정 정인지(鄭麟趾)·우의정 한확(韓確)·이조 판서 정창손(鄭昌孫)·병조 판서 이계전(李季甸)·예조 판서 김조(金銚)·좌승지 신숙주(申叔舟)·우승지 박팽년(朴彭年)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의논하여,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金師禹)·권완(權完)의 딸을 잉(媵)<내관(內官)의 작질(爵秩)>으로 할 것을 아뢰었다.
<단종이 임금일때 기록인 단종실록에 수왕대군이 아니라 세조로 기재된 걸로 봐서, 1464년 10월 14일에 세조가 <정난일기>의 편찬을 명했을 때 ,그 내용이 '노산군 일기'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469년(예종 1년)에 왕이 춘추관에 명해 노산군 때의 일기와 계유정난 때의 사초를 들이게 하여 그 범례를 살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노산군 일기'의 편찬 작업이 마루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노산군 일기'에는 즉위전 수양대군을 세조라고 부르고 있어, 세조가 죽은 뒤에 작성되었음이 분명합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의 자리에 오를 때는 의덕왕비(세조 1년, 1455.7.11)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2년 뒤인 1457년 6월 김문기, 이개, 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1456년 6월)을 문제삼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된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 정순왕후는 18세의 일이었다. 그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단종 1457년 10월 21일 사망 -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왔으며 복득이란 자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살해)

정순왕후 사릉 비각01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신해 2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화의군 등을 금방에 처하다. 노산군이 자살하자 예로써 장사지내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듣건대, 유예부단(猶預不斷)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고, 사은(私恩)으로 대의(大義)를 멸절(滅絶)하면 대계(大計)를 해친다고 합니다. 전일에 간흉(姦兇)들의 변란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참여하여 종사에 죄를 지었고, 이유(李瑜)(금성대군)는 그를 성원(聲援)하는 일당과 교결(交結)하고 불궤(不軌)할 것을 도모하여 신민이 함께 분노(憤怒)하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사사로운 은혜를 돌아보시고 차마 법에 두지 못하시어, 외방으로 옮겨 놓으시고 곡진히 성명(性命)을 보전케 하셨는데도, 오히려 그 재조(再造)의 덕(德)을 알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여 장차 노산군을 끼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으니, 죄악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는데, 어찌 다시 용서하여 국법을 문란케 하겠습니까? 신 등이 누차 법을 바루시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분울(憤鬱)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영(李瓔)(영빈강씨 1남, 화의군) ·이어(李𤥽)(혜빈양씨 첫째, 한남군) ·이전(李瑔)(혜빈양씨 셋째, 영풍군) ·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흉악한 모역죄는, 왕법(王法)에 반드시 주살(誅殺)하여 용서하지 못할 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밝히어서 화근(禍根)을 끊고 인심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이 상소하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무거운 것이어서, 대의가 있는 곳에는 친속(親屬)도 주멸(誅滅)하는 법입니다. 노산군의 전일의 변(變)은 그 죄가 종사에 관계되어 입으로 말할 수 없으며, 는 화심(禍心)을 품고 불궤(不軌)를 꾀하였으니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 전하께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외방에 안치(安置)해 두었습니다. 은사(恩賜)가 많이 무거웠는데도, 오히려 성은(聖恩)을 생각하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반란을 시도하며 노산군을 끼려고 도모하였으니, 그 죄는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뜻을 굽혀 그 죽음을 용서하시려고 하여 신 등이 여러 날 정청(庭請)을 계속하였으나,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여, 대소 신료가 분통함과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이영(李瓔)(영빈강씨 1남, 화의군) ·이어(李𤥽)(혜빈양씨 첫째, 한남군)·전(瑔)(혜빈양씨 셋째, 영풍군)·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일당이 반역한 죄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밝히시어 신민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유(李瑜)(금성대군)는 사사(賜死)하고, 영(瓔) ·이어(李𤥽) ·전(瑔) ·송현수(宋玹壽)는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영(瓔)·이어(李𤥽)·전(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도 죄가 같으니, 또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불가하다. 옛사람의 말에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고, 또 성인(聖人)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대로 처치한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
하고, 명하여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瓔) 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실록에서는 단종이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 가계도

1454년 1월에 결혼하여 1457년 6월에 헤어지니 3년 5개월만의 일로 신혼의 꿈도 피지 못하고 부부의 정도 다하지 못하였으리라!

단종 장릉

윤사로정현 옹주(貞顯翁主)<세종 후궁 상침(정6품) 송씨 딸> 에게 장가들어 임금에게 총애(寵愛)를 받았으나, 성질이 요마(幺麿) 하면서도 자못 경오(警悟)하였으며, 식리(殖利)에 능하여, 외방의 농장(農莊)이 있는 곳에 여러 만석(萬石)을 쌓아 놓고, 서울 제택(第宅)의 창고도 굉장하여, 몇 리 밖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무릇 주구(誅求)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윤사로가 단종비 송씨를 받기를 원한다고 했다.(세조실록, 1447년 10월 24일), 하마터면 단종비가 세종의 부마인 윤사로에게 넘겨질 뻔 했다. 아찔하다!! - 야사에서는 신숙주가 단종비를 원했다고 한다. 하기사 18살 꽃다운 나이였으니??>

 

궁궐에서 추방당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을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동망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영월 단종문화제_정순왕후 선발대회01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 에도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애절한 사연이 묻어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 로 불렀는데 후에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 하여 '영도교' 로 불린다.

열여덟에(1457.10.21)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초막집에 살며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그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했다. 그리고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지 않고 살았다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 이라고 부른다.

영월 단종문화제_정순왕후 선발대회02

동망봉과 영도교 중간쯤 정순왕후가 살았던 터에 '정업원구기' 라는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비각에는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썼다는 비문이 남아 있다. 열여덟 과부가 된 송비가 초막을 짓고 살았던 집이 정업원이고, 그 옛터임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으로 전국 각지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고 있는 송씨 부인이 바로 한을 머금고 살다가 죽은 정순왕후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 여성들을 울리고 죽어서도 토속신이 되어 수백년 민중의 공감을 얻으며 그들의 한을 위로했다는 말이다.

단종 가계도

한많은 일생을 살다간 송비는 1521년(중종 16년) 6월 4일에 승하하니 춘추 82세였다. 송비는 대군부인의 예우로 양주 남쪽 군장리(현 사릉리)에 모셔졌다. 그후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추복되어, 종묘가 모셔지고 능호을 사릉이라 했다.

정순왕후_사릉 비각

세조는 할아버지인 태종과 달리 친동생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이고, 사육신 등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조카를 죽여 왕위를 찬탈했지만 재위기간은 13년 3개월로 권불 10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며, 쩟째아들 의경세자(덕종)와 둘째아들 예종 또한 20세 이전에 죽었음은, 문종비이자 형수이며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였을 것이다. 또한 자신도 말년에 피부병(나병?)으로 52세에 사망하였으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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