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23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편찬경위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3. 14.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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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23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편찬경위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세조 어진

세조실록 편찬 경위

'세조실록'은 총 48권과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에 종묘와 제례에 쓰이는 음악 악보를 수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세조혜장대왕실록'이며 1455년 6월부터 1468년 9월까지 13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조실록' 의 편찬 작업은 1469년(예종 1년) 4월에 시작하여 1471년(성종 2년)에 완료되었습니다. 편찬 작업은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 작업을 거친 상태여서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4월 초에 1권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세조(피부병, 나병?)_문수보살 삽화_오대산 상원사

그러나 이때 '민수의 사옥'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록 편찬 작업은 어려움에 부닥칩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초를 거둘 때 사간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대간에서는 사초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초에 서명할 경우 소신껏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관들은 왕명에 따라 서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민수는 사관 시절에 대신들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사초를 몇 군데 뜯어 고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발각되자 예종은 민수를 제주에 관노로 보내고, 서명을 반대했던 사관 두명은 사형에 처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실록 편찬은 계속됩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즉 1469년 4월 1일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여 신숙주 한명회를 영춘추관사 최항을 감춘추관사, 강희맹, 양성지를 지춘추관사, 이승소 김수령 정난종 이영은 이극돈 예승석을 동지춘추관사에 임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합니다.

'세조실록'은 처음에 6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으나 그 해 11월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6방을 3방으로 줄이고 편찬을 계속하여 2년후인 성종 2년(1471년) 12월 15일에 완성하였습니다.

세조 가계도

세조의 생애와 치세(1417.9.29~1468.9.7 재위기간 1455.윤6.11~1468.9.7. 13년 3개월)

세조는 세종의 차남이며 소헌왕후 심씨의 소생입니다. 1417년 9월 29일에 본궁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 입니다. 1428년 진평대군에 봉해졌다가 1433년(세종 15년) 함평대군으로 개봉되었고, 이후 진양대군으로 고쳐졌다가 다시 1455년(세종 27년) 수양대군으로 고쳐졌습니다. 얼굴이 특이하게 생겼고 성격이 담대하며 무예가 뛰어나 활쏘기와 말 타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무인 기질은 어린 단종의 즉위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진 틈을 타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결국엔 왕위를 찬탈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왕위에서 내쫓은 어린 조카를 비롯한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까지 죽였으며, 문종의 왕비인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녀의 일가족 모두를 죽이는 폐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39세 때인 1455년 윤 6월 1일에는 단종을 강압해 상왕으로 밀어내고, 형식적인 전위 절차를 밟아 왕위에 오릅니다. 그후 반란을 지나치게 염려해 사육신 사건(김문기, 이개, 성삼문, 박팽년 등) 같은 대규모 숙청 작업을 감행하고, 함께 반정을 꾀했던 혁명 동지인 한명회 신숙주 등을 위주로 철저한 측근 정치를 실시해 조선의 정치문화를 크게 후퇴시킵니다. 또한 세종시대를 황금시대로 이끈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토론장이자 제왕 교육장이었던 경연을 중지시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재상정치의 요람이었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왕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육조직계제를 부활시키는 등의 독선적인 정치를 펼칩니다.

세조_광릉01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호패법을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경제육전> <경국대전> 법률과 제도에 관한 서적과, 관제개편 기강확립을 통한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국방력 신장을 위해 함경도 무산에 진을 설치하고 군사를 5위로 나누어 군제를 확정했습니다. 만년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서 원각사를 창건했고,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을 간행했습니다.

그후 13년 3개월 동안 재위하다가 1468년 9월 7일에 선위하고 다음날 8일에 수강궁에서 5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세조_광릉02

명나라에서 '혜장'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조선에서는 묘호를 세조라고 올립니다. 이에 여러가지 시호가 추가되어 정식 칭호는 '세조혜장승천제도열문영무니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입니다.

능은 양주 동편 주엽산(남양주시 진접면 부평리)에 마련되었고 능호는 '광릉'입니다. 세조는 정비 1명과 후궁 1명을 두었고, 정비 정희왕후에게서 2남 1녀를 얻었으며, 후궁 근빈 박씨에게서 2남을 얻었습니다.

 

봉선사 01

봉선사 02

 

 

정희왕후 윤씨(1418.11.11~1483.3.30, 66세,태종18년~성종14년) : 아버지는 파평윤씨 판중우부사 윤번이며, 1418년 홍주 군아에서 태어났다. 태종 왕비 원경왕후 민씨와 더불어 여장부로 통했다. 1428년(세종 10년) 진평대군이던 세조와 가례를 올려 낙랑대부인에 책봉되었고, 145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계유정난 당시 음모가 누설되어 손석손등이 만류하였으나 손수 수양에게 갑옷을 입혀 거사를 독려했다. 세조 즉위후 조용히 지내다가 세조가 죽자 어린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예종이 죽자 한명회와 결탁하여 덕종의 차남 성종(13세)을 왕위에 올려 수렴청정을 하였다. 1476년 일선에서 물러난후 일체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후 7년을 더 살다가 1483년 온양의 행궁에서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부인 소혜왕후 한씨-월산대군, 성종 모),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과 함께 있다. 광릉의 원찰은 봉선사로 969년(고려 광종 20년) 법인구사가 창건하였고, 봉선사 대종은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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