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2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편찬경위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9.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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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2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편찬경위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편찬 경위

'성종실록'은 총 297권 15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1469년 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성종 재위 25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종 사후 4개월 뒤인 1495년 4월(연산군 즉위년) 노사신 등의 건의에 따라 춘추관 안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편찬 과정에서 성종대의 사관을 지낸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며 은근히 단종을 추모한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정희왕후의 상중에 기생들과 놀아난 내용을 비판하는 <화술주시>가 실려 있는 것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무오사화로 인해 실록편찬 각업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고, 작업 시작 4년만인 1499년 3월에 인쇄를 완료하여 네 곳의 사고에 나누어 봉안되었습니다.

편찬작업에는 영의정 신승선과 우의정 성준이 총재관을 맡았고, 지관사 이극돈과 안침등 15인이 실록청 당상을 맡았으며, 그 외 74인이 실록청 낭청이 되어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성종의 생애와 치세(1457.7.30~1494.12.24, 재위기간 1469.11.~1494. 12. 25년 1개월)

성종은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덕종)의 차남으로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소생입니다. 1457년 7월 30일에 세자궁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혈입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되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보살핌 속에 궁중에서 키워졌고, 자산군(5세)에 봉해졌다가 후에 자을산군(13세)으로 개봉되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학문에 관심이 깊어 스스로 도학자로 살기를 원하여 재위 기간 내내 도학정치를 추구했으며 뛰어난 선비들을 항상 곁에 두고 정사를 이끌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1469년 11월 28일, 당시 조정의 종실의 장손인 월산대군(성종의 형)을 택하지 않고 성종을 왕위에 올린 것은 한명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는 죽은 맏아들 의경세자의 자식으로 왕위를 잇길 원했지만, 제안대군이 당시 4살로 나이도 어리고, 월산군의 장인인 병조판서 박중선 또한 경계하였기 때문으로 한명회는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릴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정희왕후 윤씨

왕위에 오른 성종(13세)은 성년이 될때까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는데, 정승들이 승정원을 지배하는 구조인 원상제도의 틀 속에서 신하들의 섭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비와 신하들에 의해 지속된 7년 동안의 섭정기간 동안 성종은 왕으로서의 수업을 쌓았고, 성년이 된 뒤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도학정치를 실시해 조선의 정치를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성종의 도학정치를 이끈 세력들은 김종직을 위시한 사림들이었는데, 그 덕분에 성종대를 중심으로 사림들의 정치 참여가 본격화될수 있었습니다. 세조 때 없어진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가운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 제도' 를 실시하는 등 문화발전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또한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일부 사찰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정책' 을 철저하게 실천했습니다. 북방정책으로는 압록강 주변의 야인들을 몰아내고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습니다.

성종은 25년 1개월간 왕위에 있다가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폐비 윤씨(27세) 사사시키고 얼마살지 못했군요!!!>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명나라에서 '강정'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조선에서는 '성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습니다. 묘호에 이룰 성자가 들어간 것은, 성종대에 조선의 국법 <경국대전-갑오대전> 편찬이 완료(1474년, 성종 5년)되어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체계가 완성되었고,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 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 간행했습니다.

정현왕후 윤씨

여기에 여러 시호와 존호가 추가되어 정식 칭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입니다. 능은 광주 서학당동(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마련되었고, 능호는 선릉으로 계비 정현왕후 윤씨와 함께 묻혀 있습니다. 성종은 정비 3명과 후궁 9명을 두었고, 적자적녀 2남 1녀와 서자서녀 14남 11녀를 얻었습니다.

성종시대 유럽에서는 1474년 이탈리아의 토스카넬리가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한 것에 힘입어 콜럼버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 등이 신대륙을 찾아 나서는 시기였습니다. 1494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착해 서인도 제도의 자메이카 섬을 발견했고 디아스는 1488년 희망봉을 찾아냈습니다.

공혜왕후 한씨(1456.10.11~1474.4.15, 성종5년 19세) : 아버지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4째딸로 어머니는 민대생<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의 딸 여흥 민씨, 1467년 12세의 나이에 한살 어린 자을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몸이 약함. 세조비 정희왕후는 덕종의 장남인 월산대군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으나 한명회의 주장대로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세웠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씨는 146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능은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순릉' 이다.

<한명회 9남7녀, 여흥민씨(1남, 4녀), 연일정씨(정종화의 딸, 정몽주의 서손녀, 3남), 전주이씨(선천 공조의 딸, 5남 3녀)>, 동생 한명진(권람 동생 권제의 딸과 혼인)

장남 : 낭성군 한보(琅城君 韓堡, 1447년 ~ 1522년)(부인, 한성군 이훈(李塤)의 딸, 6남3녀)

장녀 : 한씨 - 신주(申澍)<고령부원군 신숙주 장남>의 처.

차녀 : 한씨 - 윤반(尹磻)<영천부원군 윤사로와 세종(후궁 상침송씨)의 딸 정현옹주의 장남>의 처. 슬하 2남 5녀.

삼녀 :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년 ~ 1461년) - 예종의 정비(正妃), 인성대군(5세졸)

사녀 :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 ~ 1474년) - 성종의 정비(正妃)

폐비 윤씨

폐비 윤씨(1455.7.24~1482.9.7, 27세) :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고령 신씨의 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 본관은 함안으로 고려 윤관 장남의 후손임<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등은 윤관의 4남 후손임>. 외가 쪽으로는 친정어머니의 친사촌오빠가 신숙주임. 1473년 숙의(종2품)로 책봉되었고, 성종보다 두살 위였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1474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에 올랐다(1476.9.5). 그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아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녀는 질투심이 많았고 후궁에 대한 감시가 심했다. 비상을 숨겨두기도 했고 후궁들을 저주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급기야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어<야사> 궁궐에서 쫒겨나(1479.8.16) 친정에서 지내다 1482년 사사된다.허종과 허침은 입궁하지 않고 일부러 굴러 떨어져 갑자사화를 피함<야사>. 인수대비와 후궁들의 모함과 반성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성종은 사약을 내렸다. 이 사건은 금언령이 내려지고 세자 융은 생모의 존재를 모르고 자랐다. 연산군 즉위후 임사홍등이 그녀의 존재를 알려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아들 안양군, 봉안군), 귀인 엄씨, 등이 살해되고 인수대비 또한 머리를 받쳐 죽는다. 폐비 윤씨의 묘는 경기도 장단에 마련되고, 성종은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로 추승되고 묘도 '회릉' 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윤씨의 관작이 추탈되고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정현왕후 윤씨

정현왕후 윤씨(1462.6.25 ~1530.8.22, ) : 아버지는 파평 윤씨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이며 어머니는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로, 충청도 신창의 관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윤창년. 1473년 12살의 나이로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종2품)에 봉해졌다. 1479년 윤씨가 폐출되자 1480년 11월에 성종의 3번째 왕비에 봉해졌다. 윤씨 폐출에 깊이 관여했고 성종의 윤씨 복위를 인수대비와 함께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세자 융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그녀가 생모인줄 알았다. 그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1494년) 1497년에 자순왕대비에 봉해졌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때 박원종의 의견대로 진성대군(중종)을 즉위 시키는 것을 허락하고, 중종 즉위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의 죽음등에 깊이 관여했다. 1530년 6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소생으로 신숙공주(1478년생)와 중종(1488년생)이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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