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편찬경위, 폐비 신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10.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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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편찬경위, 폐비 신씨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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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경위

'연산군일기'는 총 63권 4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1494년 12월부터 1506년 9월까지 연산군 재위 11년 9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편찬작업은 연산군 사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되었고, 폐위된 왕의 사실을 편찬하는 것이라 '일기 수찬' 이라는 명목하에서 일기청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편찬 작업이 재개되었는데, 3개월 후 '편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연산군 때 신임을 받던 일물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이 편찬작업에 동원된 인원은 총 66명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사료가 부족했고, 또 한편으론 작성된 사료의 신빙성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산군_엄소용 정소용

연산군 때의 시정기는 자주 검열을 받아 어느 누구도 쉽게 직필을 하지 못했고, 사관이 경연이나 청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사관으로 임명된 인물이 연산군의 측근이 많아 사료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연산군 폐출 이후 사관들의 활약 또한 지나치게 위축되어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오사화의 여파로 사초 이후에 닥칠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은 시행 3년 만인 1509년 9월에 완료되어 제반의식을 간단히 치른후 실록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사고에 봉안되었습니다. '연산군일기' 는 봉안, 관리 면에서는 실록과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내용과 체제는 실록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게 한권에 1~2개월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6~7개월분을 수록한 것도 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무오사화의 후유증으로 사초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용된 사초는 정희량과 이종준이 작성한 것이 대부분으로, 나머지 사초는 아예 제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 사건에 대한 정확한 서술을 하지 못했고, 사건 자체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채 실린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연산군_장록수

또한 사초의 내용도 편지들에 의해 많이 윤색된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연산군의 폭정을 행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실록에는 사건에 대한 관점, 평, 의미 등을 적은 사론이 있어야 하는데 '연산군일기' 에는 사론이 25개 정도 수록되어 있어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 사론들도 연산군의 패륜적인 비행에 대한 것뿐이어서 객관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런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볼 때 '연산군일기'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다소 과장된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며, 또한 연산군의 폭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정작 기록해야 할 구체적인 사건들을 너무 소홀히 다룬 점 또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실록 편찬 과정과 달리 조정이 '연산군일기' 편찬에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연산군의 생애와 치세(1476..~1506., 재위기간 1494.12 .~1506. 9, 11년 9개월)

성종의 장남이며 폐비 윤씨의 소생인 연산군은 1476년에 태어났습니다. 여덟살 때 세자가 된 그는 공부를 싫어하고 성격이 거칠었습니다. 때문에 손순효와 같은 뜻있는 신하들은 성종에게 그를 세자에서 폐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고, 성종 또한 그에게 군왕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폐하지는 못했습니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연산군은 광폭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두 번의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 폭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기생을 거느리고 흥청망청 놀며 국고를 탕진했고, 어염집 아내는 물론 신하의 아내 심지어는 큰어머니까지도 욕을 보이는 패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박씨_월산대군 부인_연산군 큰어머니

거기다 부왕의 후궁들을 직접 죽이고, 할머니인 인수대비 또한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민가를 철거하고 사냥터를 만드는 등의 조선 역사상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극악무도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보다 못한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1506년 9월에 그를 내쫒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십여년간 지속되었던 연산군의 폭정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폐출된 후 연산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두 달 뒤인 11월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임금에서 쫒겨난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그 때문에 묘호도 받지 못한 채 '연산군' 으로 불립니다.

묘는 양주 해등촌(현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마련되어 있으며, 아무 장식 없이 '연산군지묘' 라는 비석만 세워졌습니다. 연산군은 정비 1명과 후궁 1명을 두었는데 정비에게서 적자적녀 2남 1녀와 후궁에게서 서자서녀 2남 1녀를 얻었습니다.

연산군 시대에 유럽에서는 콜럼버스와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의 탐험에 힘입어 아메리카 대륙, 인도, 남아프리카 등에 상륙해 침략을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이 <최후의 만찬> <다비드> 등의 작품을 생산한 시기이며, 이탈리아에서는 문예부흥이라 불리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습니다.

폐비 씬씨(1476.11.29~1537.4.8, 62세) : 폐비 신씨는 거창 신씨 신승선과 어머니 중모현주(中牟縣主) 이씨(李氏-아버지 임영대군)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폐비 신씨를 비롯하여 신씨의 형제들은 각각 왕실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으로, 폐비 신씨의 큰오빠인 신수근인수대비의 당조카와 혼인하였으며, 셋째 오빠인 신수영안순왕후 한씨(예종 계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또한 중종단경왕후 신씨의 고모이며, 성종의 5녀 경순옹주의 남편인 의성위 남치원의 이모이기도 하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에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1488년)되었고 1491년 휘신공주를 낳았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1494년). 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대궐에서 쫒겨나 후궁 처소인 정청궁에 머물다 중종 32년(1537년)에 사망했다. 묘는 양주 도봉산 해촌리에 묻혔으며, 현재 서울 도봉구 방학동연산군묘로 이전되었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은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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